abstract
| - 한중(漢中)은 파촉의 초입으로 관중에서도 가장 궁벽한 모퉁이가 되는 파촉 땅이였다. 한나라(漢)의 최소 강역이였다. 청사(淸史) 지리지에 따르면 한중(漢中)은 위원(渭源)의 서쪽과 이웃하는 지명이다. 한수(漢水)는 현 감숙성(甘肅省)의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롱서(隴西) 서현(西縣) 아래에 흐르며, 한중(漢中)에 이르는 강이다. 유군(幼君) 자영(子)이 진왕이 되어 조고를 처단했으나, 자영은 BC 207년 한중(漢中)에 들어온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불과 3세, 15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초패왕은 기름진 서초(西楚) 땅을 차지하고 유방은 한왕에 봉하여 파촉(巴蜀) 한중에 가둬 놓는다. 한중에서 파촉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양평관도 있다. 촉의 수도 성도를 지키는 면죽관도 있다. 그리고 당시 한나라의 수도였던 낙양을 지키는 관들이 있다. 동쪽으로는 호로관, 서쪽으로는 함곡관이 있다. 홍문회 연회에서 장량(장자방)의 지락으로 살아남은 유방은 항우의 명에 따라 한중왕으로 파촉 땅으로 가게 되었다.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에 책봉되어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차지하였다. 땅이 너무도 험난하여 길이 따로 없고, 절벽에 선반을 놓아 만든 잔도라는 길을 넘었다. 한왕(漢王)을 받아들인 유방이 잔도를 불사르고 관중에서도 가장 궁벽한 모퉁이가 되는 파촉 한중으로 들어갈 때는 천하 대세가 그걸로 모두 결정된 듯 보였다. 그러나 유방은 얼마 안 있어 그는 관중(關中)으로 출병하여 한신과 장량의 도움을 받아 몰래 한중을 빠져 나온 뒤 패왕이 진나라 땅에 갈라 세워둔 세 왕을 차례로 쳐부수고 항우와 4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계륵은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나오는 말로, 위(魏)나라 조조(曹操)와 촉(蜀)나라 유비(劉備)가 한중(漢中) 땅을 놓고 싸울 때, 조조는 진격이냐 후퇴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만들어진 한중을 뜻하는 말이다. 이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서 조조와 유비는 잦은 쟁탈전을 하였다. 계륵(鷄肋)이란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깝다는 뜻으로 조조가 유비와 한중(漢中)땅을 놓고 진퇴양난으로 고민하고 있을때 암구호로 쓰며 유명해진 말이다. 2천여 년 전부터 유래한 이말이 현재 우리 일상에도 자주 쓰이고 있다. 옹주 파저족 유랑민은 이특·이상 형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한중(漢中)으로 이동하였는데, 서진(西晉) 정부가 이들 유민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이특은 지방관에게 뇌물을 써서 이를 무마하고 촉(蜀)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후한(後漢) 마융전주(馬融傳注)에 의하면 한중(漢中)의 편어(扁魚)는 맛이 매우 좋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잡는 것을 금지하며 뗏목으로 물을 막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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