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에센 칸은 오이라트 부의 타이시였다가 북원의 대칸(재위:1453년 - 1454년)이 되었다. 오이라트부의 지도자는 칸이라는 직위대신 太師(타이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타이시라는 칭호는 몽골제국 시대 군사령관이라는 의미였다. 오이라트부 지도자가 실권을 장악하였음에도 칸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오이라트부는 칭키스칸의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들이 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고 하드라도, 몽골의 유목민들이 그를 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이를 칭키스칸의 통치원리(chinggisid principle)라고 하였다. 1416년 마흐무드가 죽고 그 아들 토곤이 마흐무드의 지위를 이어받는데, 토곤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아울러 토곤의 아들이 에센인데, 이 부자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1428년 토곤과 손을 잡은 쿠빌라이가문의 톡토아부카가 동몽골의 칸이었던 아다이를 살해하게 되는데, 칭키스칸 가문의 인물이 칭키스칸 가문의 아다이를 살해함으로써 1431년 케룰렌 유역을 병합하여 오이라트는 전몽골 초원을 손에 넣게 되었다. 타이슨 칸은 오이라트의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1439년 토곤이 죽고, 태사라는 직위는 아들인 에센이 승계하였다. 에센은 토곤이 착수한 차가타이계의 영토공략에 박차를 가해 일리와 투르판, 하미지역을 평정하고, 현재의 신강위구르 자치구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동시에 주치가문의 킵차크 칸국에 대한 공략도 서둘러서 그 영토의 일부를 오이라트세력권내로 편입시켰다. 에센 시대 오이라트부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발하슈 호에서 바이칼 호까지,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1406년 명나라의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정통제 14년(1449년) 명나라 변방인 산시 성 다퉁(大同)으로 침입하였다. 토목의 변(土木之變) 또는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명나라 정통제 14년(1449년)에 발생한 명나라와 몽골 부족을 통일한 오이라트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명나라 영종(정통제)가 서몽골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도리어 포로가 된 사건이었다. 에센족은 포로로 잡은 영종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1450년에 명나라 조정에 송환했다. 에센이 몽골초원을 지배하고 있을 때, 명목상의 칸은 케룰렌 강에 본거지를 둔 타이슨 칸이었다. 에센은 누이동생을 타이슨 칸의 정부인으로 들여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칸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타이슨 칸이 여기에 반발을 하면서, 에센을 공격하나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1452년 타이슨 칸 살해 후 에센은 동몽골 황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황족 중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닌 경우에는 모두 죽여 버렸다. 에센은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동몽골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것 심지어는 기록과 문서 그리고 족보 등도 거의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이듬해 에센은 스스로 대칸 위에 오르게 되는데, 칭키스칸 가계가 아닌 오이라트 계통의 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에센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부하에게 살해가 되었다. 에센의 피살과 함께 오이라트 부도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하여 오이라트는 몽골의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오이라트는 서쪽에서 새롭게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나중에 몽골 고원을 다시 장악하게 되는 준가르 제국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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