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征韓論)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가 불평사족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자고 주장한 것이라고 연상할 것이다.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성공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 참여하다가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것이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천황이라 부를 수 없다는 조선을 악우(惡友-후쿠자와 유키지의 주장)라 하며 ‘한국을 쳐야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었고, 마침내 대륙 침략에 앞서 한반도 잠식이 먼저 진행되었던 것이다. 정조론이 메이지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정한론(征韓論)으로 이름이 바뀐 논쟁은 일본의 권력집단을 두 패로 갈라놓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조선반도를 놓고 정치세력간에 큰 견해 차가 있었다. 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여 일본과 아시아의 안위를 서구로부터 지켜야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사회갈등이 높아져갔던 일본은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이러한 내부갈등을 해결 하기위해 역시 조선을 선택 정한론을 내세워 한일합방에 이르게 된다. 분류:일본의 역사 분류:가고시마
정한론(征韓論)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가 불평사족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자고 주장한 것이라고 연상할 것이다.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성공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에 참여하다가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것이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천황이라 부를 수 없다는 조선을 악우(惡友-후쿠자와 유키지의 주장)라 하며 ‘한국을 쳐야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었고, 마침내 대륙 침략에 앞서 한반도 잠식이 먼저 진행되었던 것이다. 정조론이 메이지 조정에 대한 반란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정한론(征韓論)으로 이름이 바뀐 논쟁은 일본의 권력집단을 두 패로 갈라놓았다. 당시 일본에서도 조선반도를 놓고 정치세력간에 큰 견해 차가 있었다. 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여 일본과 아시아의 안위를 서구로부터 지켜야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서 일어났던 일본 정부 내에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초기에 대두된 조선침략론이다.일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받들어 국가 경쟁력을 높이며 이웃나라 한국을 정벌하여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 정책논의는 메이지(明治) 유신과 함께 시작된다. 1873년의 정한론(征韓論)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을 무력침공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으로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에도 제기되었다. 일본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이 오버랩되어 막부말기의 정한론(征韓論)이 된다. 정한론은 핵심세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각 파벌이나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르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극우 일본사학자들 중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에 부정적이었는데 이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어리석다고 비웃는 자들이 있다. 이 시대 대표적 우익인사로는 1870년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등을 들 수 있다. 사회갈등이 높아져갔던 일본은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이러한 내부갈등을 해결 하기위해 역시 조선을 선택 정한론을 내세워 한일합방에 이르게 된다. 분류:일본의 역사 분류:가고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