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강릉 읍성은 근대 이전 고려와 조선시대에 강릉지역의 치소(治所)가 위치했던 행정중심지에 조성되었던 성곽을 말하며, 관아유적은 강릉읍성 내에 존재했던 치민을 위한 시설물을 일컫는다. 강릉읍성은 고려시대 강릉부가 있었던 읍치소에 축조된 성곽이다. 남서쪽으로 성산면 어흘리의 대관령, 보광리 그리고 왕산면 목계리 남쪽 두리봉과 대화실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구산에서 시내로 흘러온 물은 남쪽에 제비리·회산동·내곡동·노암동·입암동·두산동, 북쪽에는 금산리·홍제동·남문동·성남동·옥천동·포남동·송정동을 지나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북으로는 화부산에서 서쪽으로 고개가 병풍처럼 이어지고 있으며 동쪽은 평야지대가 이어지고 바다와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남대천 북쪽 읍성이 위치했던 지역은 해발 표고 70m 미만의 낮은 평지지역이다. 성내의 지형은 대체로 북쪽이 남쪽보다 높으며, 동쪽보다 서쪽이 높은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 강릉읍성은 시가지로 변해서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10년대 말 처음으로 제작된 지적도면상에 강릉읍성은 남북으로 마름모꼴로 나타나는데 구 강릉시청사와 임영관지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측은 현 농협용강지소(용강 36-8번지), 남측은 명주초등학교 앞 삼거리(명주 63-5번지), 동측은 현 강릉농협 건너 동보성 앞(성내 12-3번지), 서측은 강릉여중 서북편(용강 46-6번지)이다. 강릉읍성의 성체는 이 네 곳을 연결하여 정남북으로 마름모꼴 형상이었다고 추정된다. 현재 성벽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곳은 읍성의 동북벽에 해당하는 천주교 임당성당 동쪽에 15m 가량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70년대까지는 남벽, 서벽의 일부가 명주초등학교와 강릉여중 근처에서 확인되었으며 당시에 높이 1.8m, 길이 150m의 성의 석축이 남아 있었음을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모두 콘크리트 담벽으로 바뀌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남문동 131-4번지 민가의 담장 하부에 사용된 석재 일부는 당시 읍성의 성벽에 사용된 석재로 보인다. 강릉읍성에 대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관동읍지』, 『임영지(臨瀛志)』, 『강릉군지』,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 『강원도지』 등 대부분의 지리지 기록은 읍성의 규모와 읍성 내 연못, 우물, 관아시설들에 대한 현황, 또는 관아시설의 개보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각 지리지가 앞선 기록을 그대로 기록하여 같은 경우도 있고,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시대에 따라 증개수하면서 토성이 석축으로 바뀌며 석축의 길이가 길어졌고 이를 둘레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세종 때 토성 784보는 환산하면 약 1,469m인데, 중종 때 석축 둘레가 3,782척으로 1,181m인 실제 규모와 다르다. 당시 서북벽은 축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를 일관되게 기록한 것이다. 1975년 간행된 『임영강릉명주지』를 만들 때에도 현장조사 없이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기록하지 못하고 앞선 지리지와 같은 정도의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강릉읍성의 초기 축성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말기 하삼도의 연해에 축성된 여러 읍성과 같거나 조금 후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강릉읍성은 고려말기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강릉의 읍격의 승강과 부침을 같이하며, 현·부성의 기능을 해왔다. 조선 세종대의 ‘읍토성’이라는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강릉읍성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종 대에는 강릉·평창·정선·영월의 군사 1,556명을 동원하여 총연장 3,720척, 높이 5~6척 또는 7~8척의 성을 쌓게 하였다. 중종 7년(1512) 석성으로 고쳐 쌓았고, 문을 4개소에 두었으며 우물이 14개소 연못 2개소이며 성의 둘레가 1,181m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여러 기록들이 강릉읍성의 둘레를 2,782척 정도로 기록하고 있으며, 초기 토성 자리에 석축으로 개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성체의 실제 둘레는 1,826m로 기록과 다른 것은 당시의 석축한 성벽의 둘레만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강릉읍성은 동서남북에 가해루, 망신루, 어풍루, 빙허루의 문루를 갖추고 있었으며, 동문루에는 금종을 매달아 수차에 걸쳐 개수한 기록이 확인된다. 대문의 쓰임새는 중·개수 기록이 빈번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동문과 남문이 주로 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성과 관련한 직접적인 기록으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24)경 부사 서득운이 성을 더 축조한 사실이 처음 보인다. 이때까지 강릉읍성은 군사적 목적보다 행정적 목적으로 활용되어왔던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성을 더 축조한 것은 실질적으로 전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강릉 사회가 전쟁에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강릉읍성에 관한 주요기사는 읍성의 동문과 남문의 중·개수에 대한 것이 잦고, 1630년(인조8)경 부사 민응형 부터 1800년(순조1) 조흥진까지 여러 명의 부사들이 사문 조성, 성첩보수, 여장신축, 서북문 근처에 연정 건립, 군사 2천명을 모집하여 다시 쌓은 일, 동문에 금종을 다시 만든 일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관동읍지』의 기록에 따라 성내에 있었던 관부의 시설물을 살펴보면, 1788년경 읍성에는 남문(어풍루6칸), 동문(가해루6칸), 내아(17칸)와 부속건물(익랑16, 행랑17칸), 객사(임영관9칸, 동대청13칸, 서헌6칸, 중대청12칸, 즉청방6칸, 월랑31칸, 삼문6칸), 의운루(6칸), 사대(9칸), 부사 (12칸), 작청(18칸), 군기청(16칸), 노방(8칸), 부창(32칸) 등의 공공시설이 성내를 채우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읍성지에는 지정문화재로 국보 제51호인 강릉객사문과 사적 제388호인 임영관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이 있다. 강릉읍성의 자리에는 방송국, 기상청, 한국은행, 농협, 강릉여자중학교 등의 공공기관 단체의 건물을 비롯하여 읍성이었던 영역이 전부 시가지로 변했다. 임영관지 객사문이 최근 해체보수공사를 마무리 하였으며, 임영관은 중대청이 복원되었고 전대청과 동·서 익랑이 복원되었으며 서쪽 익랑까지 복원되면 임영관의 시설이 모두 복원될 예정이다. 이상과 같이 강릉읍성은 고대의 예국고성, 명주성, 조선시대의 강릉읍성의 과정을 거쳐 변천해왔다. 특이한 점은, 가장 이른 시기의 예국고성이 강릉읍성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넓고 크다는 것이다. 예국고성이 더 낮은 평지 지역에 위치하고 성내에 주민 거주지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강릉읍성은 읍성 내에 주민 거주지라기보다는 관아에 딸린 관속들의 주거와 관아시설들만 배치되었으므로 규모가 축소되었다고 생각된다. 예국고성이 방어성격을 띠고 넓은 성곽 내에 주민들을 수용하였던 데 비하여 강릉읍성은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고 관아 중심의 읍성으로 변화된 것이다. 강릉읍성이 형성되어 있던 당시의 주민 거주지는 읍성 가까운 곳에 일부 밀집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농토를 따라 분산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관아는 중앙정부의 정령을 지방에 관철시키는 기구로서, 사회세력을 정치제도화 하였다. 관아는 지리적으로 중앙으로 통하는 교통요지에 물산의 유통을 고려하여 풍수지리의 논리에 따라 터를 잡았으며, 한 고을의 자생력, 군사적, 행정적 관점을 감안해서 보통 읍성 내에 위치하였다. 강릉관아는 1800년대 말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지나 현대적인 도시가 발달하면서 급속히 파괴되어 현재 객사문과 칠사당만 남았다. 불과 100여년의 역사에서 완벽에 가까운 파괴·멸실(滅失)로 개발논리에 묻혀버린 것이다. 강릉관아의 전체적 모습은 재건될 수 없겠지만, 강릉읍성 내에 강릉의 천년여의 역사를 담고 있었던 옛 관아의 일부분이라도 온전히 살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옛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던 임영관이 복원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강릉읍성을 중심으로 여러 관아 시설이 즐비하게 배치되었을 것이니, 각 관아시설들의 구성이나 배치상황 등을 복원해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하다. 한편 관아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향청, 질청, 강릉향교, 향현사, 계련당도 일정 부분 관아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2001년 12월 17일, 강릉시청사가 명주동 38-1번지 옛 관아터에서 홍제동 1001번지로 새로이 이전, 개청하였다. 이 사실은 강릉시청이 과거(부족국가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부터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읍치지 성격의 도시에서 현대 도시발달의 행정중심지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강릉도 대부분의 전통도시들과 마찬가지의 도시발달 과정상에 있었지만, 이제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와 완전한 단절을 통한 새로운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도시 확대과정을 밟게 된 것이다. 분류:읍성 분류:강릉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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