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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공왕 (孝恭王?~912)은 신라 제52대 왕(897~912 재위)이였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 김씨(義明王太后金氏)이다.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892년(신라 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견훤왕은 광주(光州)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진성왕 9년경에는 송악 출신 왕건도 궁예의 부하로서 신라의 북변 지방을 휩쓸었다.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진성 여왕은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태자인 요(嶢)에게 선양하였으니, 이가 곧 효공왕(孝恭王)이다. 그러나 혼란 상황은 가라앉지 않고 더욱 가속화되어 급기야는 두 개의 커다란 세력권으로 모아지게 된다. 893년(진성여왕 9) 태자에 책봉되고 897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다. 봉림사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된 곳이며, 봉림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1) 때 원감(圓鑑) 국사 현욱(玄昱, 787∼868)이 창건한 사찰이다.
- 효공왕 (孝恭王?~912)은 신라 제52대 왕(897~912 재위)이였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 김씨(義明王太后金氏)이다.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892년(신라 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견훤왕은 광주(光州)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진성왕 9년경에는 송악 출신 왕건도 궁예의 부하로서 신라의 북변지방을 휩쓸었다.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진성여왕은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태자인 요(嶢)에게 선양하였으니, 이가 곧 효공왕(孝恭王)이다. 그러나 혼란상황은 가라앉지 않고 더욱 가속화되어 급기야는 두 개의 커다란 세력권으로 모아지게 된다. 893년(진성여왕 9) 태자에 책봉되고 897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다. 광화15년 임신년 봉성사 바깥 문에 21칸의 까치집을 지었다. 봉림사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된 곳이며, 봉림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1) 때 원감(圓鑑) 국사 현욱(玄昱, 787∼868)이 창건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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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공왕 (孝恭王?~912)은 신라 제52대 왕(897~912 재위)이였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 김씨(義明王太后金氏)이다.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892년(신라 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견훤왕은 광주(光州)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진성왕 9년경에는 송악 출신 왕건도 궁예의 부하로서 신라의 북변지방을 휩쓸었다.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진성여왕은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태자인 요(嶢)에게 선양하였으니, 이가 곧 효공왕(孝恭王)이다. 그러나 혼란상황은 가라앉지 않고 더욱 가속화되어 급기야는 두 개의 커다란 세력권으로 모아지게 된다. 893년(진성여왕 9) 태자에 책봉되고 897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다. 광화15년 임신년 봉성사 바깥 문에 21칸의 까치집을 지었다. 봉림사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된 곳이며, 봉림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1) 때 원감(圓鑑) 국사 현욱(玄昱, 787∼868)이 창건한 사찰이다. 호족중 제일 세력이 강대했던 송악지역(왕륭, 왕건 부자의 세력)을 항복으로 받아내면서 901년 송악을 도읍으로 효공왕 5년(901년)에 후고구려 세운다. 견훤역시 궁예보다 1년빠른 효공왕 4년(900년)에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한다. 가은현에서 출생, 부친은 이아자개. 신라의 장군으로 일어나 진성왕 6년( 892년 )에 무진주를 점령했고 이어 효공왕 3년( 900년 ), 완산주( 현 전주 )에 도읍하여 진백제를 세워 연호를 정개라 했다. 900년(효공왕 4) 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 효공왕 (孝恭王?~912)은 신라 제52대 왕(897~912 재위)이였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 김씨(義明王太后金氏)이다.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892년(신라 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견훤왕은 광주(光州)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진성왕 9년경에는 송악 출신 왕건도 궁예의 부하로서 신라의 북변 지방을 휩쓸었다.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진성 여왕은 재위 11년 만에 왕위를 태자인 요(嶢)에게 선양하였으니, 이가 곧 효공왕(孝恭王)이다. 그러나 혼란 상황은 가라앉지 않고 더욱 가속화되어 급기야는 두 개의 커다란 세력권으로 모아지게 된다. 893년(진성여왕 9) 태자에 책봉되고 897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렸다. 호족중 제일 세력이 강대했던 송악지역(왕륭, 왕건 부자의 세력)을 항복으로 받아내면서 901년 송악을 도읍으로 효공왕 5년(901년)에 후고구려 세운다. 견훤 역시 궁예보다 1년빠른 효공왕 4년(900년)에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한다. 가은현에서 출생, 부친은 이아자개. 신라의 장군으로 일어나 진성왕 6년( 892년 )에 무진주를 점령했고 이어 효공왕 3년( 900년 ), 완산주( 현 전주 )에 도읍하여 진백제를 세워 연호를 정개라 했다. 900년(효공왕 4) 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봉림사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된 곳이며, 봉림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1) 때 원감(圓鑑) 국사 현욱(玄昱, 787∼868)이 창건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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