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여진(建洲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 중 하나로 5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나라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만주 최북방의 야인 여진(野人女眞)과 현대의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지린 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도리와 후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그는 몽골에 대해 동맹을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여진족의 중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그들은 두만강 근처에 모여 있었다. 오래지 않아 다양한 여진족이 명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아하추(阿哈出)는 후에 이사성(李思誠)으로 알려졌으며 후리가이의 부족장이었다. 1403년 그는 건주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사령관이 되었다. 오도리의 몽케 테무르(猛哥帖木儿)는 건주 좌지휘사의 지도자가 되었고 중국인의 성씨인 동(童)을 하사받았다. 홍치제는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하미(哈密), 달단(韃靼)과의 관계를 개선한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건주여진(建洲女眞)은 여진족의 세 분파 중 하나로 5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나라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만주 최북방의 야인 여진(野人女眞)과 현대의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지린 성의 건주 여진(建洲女眞)이다.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도리와 후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그는 몽골에 대해 동맹을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여진족의 중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그들은 두만강 근처에 모여 있었다. 오래지 않아 다양한 여진족이 명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아하추(阿哈出)는 후에 이사성(李思誠)으로 알려졌으며 후리가이의 부족장이었다. 1403년 그는 건주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사령관이 되었다. 오도리의 몽케 테무르(猛哥帖木儿)는 건주 좌지휘사의 지도자가 되었고 중국인의 성씨인 동(童)을 하사받았다. 영락제는 북원과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마(馬)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홍치제는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하미(哈密), 달단(韃靼)과의 관계를 개선한 황제로 평가되고 있다. 1500년대에 이르러 건주 여진의 세력은 점차 요동과 조선의 강역으로 확장되려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1586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에게 큰 피해를 입은 뒤, 여진족을 다시 공격하여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기도 하였다. 같은해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는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칭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나라(淸)의 기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