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파국(伴跛國) 또는 반로국은 대가야, 상가라 등으로 불렸다. 가실왕이전까지 고령지역의 소국은 반로국 또는 반파국이었다. 그러나 가실왕 대부터 처음으로 대가야국의 건국설화인 가야산신 감생설(정견모주설)을 주장하여 김해 가야와 구별되게 하였고, 나라 이름을 대가야라 칭하였다. 대가야(大伽倻)는 경상북도 고령지역에 있던 6가야중 하나다. 대가야는 안정적인 농경 입지 조건을 갖춘 경상북도 고령을 도읍지로 했다. 서기 529년 반파국(伴跛國)의 왕에게 신라의 왕녀를 시집 보내어 반파국과 혼인동맹을 맺었고, 반파국과의 혼인동맹이 깨어진 후 반파국의 8성을 빼앗았다. 니혼쇼키(日本書記)에는 가라(加羅)라 나오기도 하며, 구체적으로 반파국(伴跛國)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대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시조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였다. 출토 대다수의 토기는 남원 지역만이 가지는 지역색을 가지고 있어 일본서기 계체기 7년(513년)에 보이는 반파국(伴跛國)을 대표하는 고분 문화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분류:가야 분류:대가야
반파국(伴跛國) 또는 반로국은 대가야, 상가라 등으로 불렸다. 가실왕이전까지 고령지역의 소국은 반로국 또는 반파국이었다. 그러나 가실왕 대부터 처음으로 대가야국의 건국설화인 가야산신 감생설(정견모주설)을 주장하여 김해 가야와 구별되게 하였고, 나라 이름을 대가야라 칭하였다. 대가야(大伽倻)는 경상북도 고령지역에 있던 6가야중 하나다. 대가야는 안정적인 농경 입지 조건을 갖춘 경상북도 고령을 도읍지로 했다. 해안지역의 선진 세력들이 이주해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 가야 연맹이 와해되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반파국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5세기를 전후해 그때까지 가야 연맹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내륙의 반파국이 금관가야의 망명객을 받아들이고 자국의 내륙산간 일대의 농업 생산력과 야로(冶爐) 철광을 개발하면서 크게 성장한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은 5세기 후반, 대가야(大加耶)를 자칭하며 집권적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13개의 소국을 거느린 가야 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했다. 후기 가야 연맹은 반파국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진전된 통합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병합된다. 서기 529년 반파국(伴跛國)의 왕에게 신라의 왕녀를 시집 보내어 반파국과 혼인동맹을 맺었고, 반파국과의 혼인동맹이 깨어진 후 반파국의 8성을 빼앗았다. 가야의 분국들은 크게 반발했다. 특히 가야 분국 중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반파국(伴跛國, 고령과 성주 일대의 대가야)은 군대를 동원하여 임나의 일부인 기문(己汶, 섬진강)의 땅을 빼았는다. 임나는 천황에게 따로 주청하여“반파국(伴跛國)이 신의 나라인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은으로 판단하여 본래의 소속으로 되돌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천황은 죽문지 등을 불러 놓고 은칙(恩勅)을 선포하여 기문과 대사를 백제국에게 주었다. 반파국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니혼쇼키(日本書記)에는 가라(加羅)라 나오기도 하며, 구체적으로 반파국(伴跛國)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대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시조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였다. 출토 대다수의 토기는 남원 지역만이 가지는 지역색을 가지고 있어 일본서기 계체기 7년(513년)에 보이는 반파국(伴跛國)을 대표하는 고분 문화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분류:가야 분류:대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