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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흐바라즈는 사산왕조의 황제이다. 622년 호스로우의 대장군 샤흐르바라즈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비잔틴제국이 내적으로 정비를 시작했지만 아직 승리는 페르시아의 전유물이었다. 호스로는 그의 오랜 기간의 성공에 도취되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와 그의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영토의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선조로부터의 숙적이며, 제국의 생존을 언제나 위협해왔으며, 개인적인 빚도 남아있지 않은 거대한 제국을 이번에야말로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로써 전세는 역전되어버렸다. 호스로의 주력군은 샤흐라바라즈의 배신으로 사라졌으며, 비잔틴의 주력군은 7만이 넘은 상황이었다. 비잔틴의 주력군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통과하여, 니네베에서 호스로의 마지막 군대를 패배시켰다. 628년 초, 호스로에게는 고집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수도 크테시폰은 포위당했지만, 그는 평화조약을 무조건 거부하기만 했다. 결국,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의 아들 카바드 2세에 의해 끝나고 만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오만과 고집, 그리고 중대한 오판에 의해 마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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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샤흐바라즈는 사산왕조의 황제이다. 622년 호스로우의 대장군 샤흐르바라즈가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비잔틴제국이 내적으로 정비를 시작했지만 아직 승리는 페르시아의 전유물이었다. 호스로는 그의 오랜 기간의 성공에 도취되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와 그의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영토의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선조로부터의 숙적이며, 제국의 생존을 언제나 위협해왔으며, 개인적인 빚도 남아있지 않은 거대한 제국을 이번에야말로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24년 아제르바이잔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그는 비잔틴 배후의 아바르족과 연합하여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급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기민하게 대처하여 방어태세를 완비해두고 있었다. 중년을 넘긴 호스로는 인내심이 없었던 듯 하다. 콘스탄티노플이 생각만큼 쉽게 함락되지 않자, 그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그의 대장군 샤흐라바라즈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그 명령의 시행자가 아니라 명령의 대상에게 전달되어 버렸다. 이에 격분한 샤흐라바라즈는 그의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동맹군 아바르족은 별 수 없이 콘스탄티노플 포위를 풀어버렸다. 이로써 전세는 역전되어버렸다. 호스로의 주력군은 샤흐라바라즈의 배신으로 사라졌으며, 비잔틴의 주력군은 7만이 넘은 상황이었다. 비잔틴의 주력군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통과하여, 니네베에서 호스로의 마지막 군대를 패배시켰다. 628년 초, 호스로에게는 고집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수도 크테시폰은 포위당했지만, 그는 평화조약을 무조건 거부하기만 했다. 결국,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의 아들 카바드 2세에 의해 끝나고 만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오만과 고집, 그리고 중대한 오판에 의해 마감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세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킬 마지막 기회였다는 판단만은 정확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은 왕위를 지키기 못했다. 반란군 샤흐라바라즈가 왕위를 찬탈했던 것이다. 하지만 호스로의 대장군도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반란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년간 사산 조 페르시아는 그저 유지하기만 했다. 그러한 유지도 그들의 적 또한 약해졌기 때문이었지, 그들이 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결국, 7세기 말 아랍의 폭풍에 의해 페르시아는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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