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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고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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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고노스 2세(그리스어 Αντίγονος B΄ Γονατάς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39년, 재위 기간 : 기원전 276년 ~ 기원전 239년)는 마케도니아의 왕이다. thumb|350px|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동전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을 재건하고 그리스 전역에 패권을 확립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안티고노스 1세의 손자이며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디미트리오스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셀레우코스 1세 등을 상대로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에서 분주하게 전쟁을 벌이는 동안 안티고노스는 섭정을 맡아 BC 287년에 확립된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권 유지에 전념했다. BC 285년 디미트리오스가 셀레우코스의 포로가 되자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요구했다. 2년 후 아버지가 죽자 안티고노스가 말썽 많은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으나 BC 276년까지는 공식적인 재위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근거지가 몇 군데에 불과했으나 BC 281년 셀레우코스가 살해당하자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셀레우코스의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와 마찰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는 BC 279년 켈트족의 침공에 대항하여 그리스 방위전쟁에 참가하고 다음해에 안티오코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그는 마케도니아의 지배권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안티고노스의 외교정책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친선관계를 기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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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고노스 2세(그리스어 Αντίγονος B΄ Γονατάς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39년, 재위 기간 : 기원전 276년 ~ 기원전 239년)는 마케도니아의 왕이다. thumb|350px|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동전 마케도니아 왕국의 세력을 재건하고 그리스 전역에 패권을 확립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안티고노스 1세의 손자이며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디미트리오스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셀레우코스 1세 등을 상대로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에서 분주하게 전쟁을 벌이는 동안 안티고노스는 섭정을 맡아 BC 287년에 확립된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권 유지에 전념했다. BC 285년 디미트리오스가 셀레우코스의 포로가 되자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요구했다. 2년 후 아버지가 죽자 안티고노스가 말썽 많은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으나 BC 276년까지는 공식적인 재위 연호를 사용하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근거지가 몇 군데에 불과했으나 BC 281년 셀레우코스가 살해당하자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셀레우코스의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와 마찰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는 BC 279년 켈트족의 침공에 대항하여 그리스 방위전쟁에 참가하고 다음해에 안티오코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그는 마케도니아의 지배권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안티고노스의 외교정책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친선관계를 기조로 삼았다. BC 277년 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리시마케이아 부근에서 켈트족을 물리쳤다. 이 승전 이후에 그는 BC 276년 마케도니아인들에 의해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BC 274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피로스는 안티고노스를 마케도니아 북부와 테살리아에서 몰아냈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의 몇 군데 도시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피로스가 펠로폰네소스 지역으로 진격하자 그를 뒤쫓아갔다. BC 272년 아르고스에서 피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제 그는 테살리아 동맹의 영수를 겸임했으며 이웃한 일리리아 및 트라키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코린트와 에우보이아(에보이아)의 칼키스, 테살리아의 디미트리아스 등 그리스의 '고리'를 이루는 3대 도시에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주둔시켜 그리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들의 마케도니아 지지세력들을 지원하고 시키온·아르고스·엘리스·메갈로폴리스 등지에서 참주의 집권을 도왔다. 이제 마케도니아는 해협의 교통로와 러시아 남부지방에서 곡물 공급을 장악해 그리스를 완전하게 종속시키려면 에게 해만 손에 넣으면 되었고, 그럴 만한 힘도 회복한 셈이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아레우스 왕과 아테네 시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사주로 그리스 해방전쟁을 선포했다(크레모니데아 전쟁, BC 267~261). 이집트 함대가 사론 만을 봉쇄했지만 안티고노스는 BC 265년 코린트 부근에서 스파르타 왕을 패배시키고 이어서 아테네를 포위공격했다. 아테네는 BC 263~262년 조건부로 항복했다. 아테네의 관리들은 안티고노스가 임명한 사람들로 교체되었고,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한 지방도시로 격하되었다. 크레모니데아 전쟁 직후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와 합세하여 공동의 적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맞섰다. 안티고노스가 코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에게 해와 '섬사람 동맹'을 확보한 것이 이때(BC 255)였는지 아니면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BC 261)였는지는 불확실하다. BC 255년 프톨레마이오스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복동생 디미트리오스를 키레네의 베레니케와 결혼시킴으로써 이집트의 이웃나라인 키레네에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확립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형세가 뒤바뀌어 그리스에서 그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BC 253년 안티고노스의 조카이며 섭정이었던 알렉산드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아 코린트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독립 군주로 선포함으로써 안티고노스는 그리스 남부의 통치거점인 코린트와 칼키스를 잃었다. 또한 아이톨리아인들이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함에 따라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대한 연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미망인 니카이아를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결혼시켰으며 계략을 써서 BC 244년 코린트를 되찾았다. 이 동안에 이번에는 아카이아 동맹이 위험한 적대세력으로 떠올랐다. BC 251년부터 아카이아 동맹은 시키온의 아라토스의 지도 아래 있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아라토스를 포섭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으나 헛일이었다. BC 243년에 선전포고도 없이 아라토스는 코린트를 기습공격하여 마케도니아 점령군을 퇴각시켰다. 메가라·트로이젠·에피다우로스도 안티고노스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이 영토를 되찾으려고 하는 대신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했다. 연합세력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BC 244년경 안드로스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안티고노스는 에게 해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끝없는 전투로 이어진 생애는 80세의 나이로 끝났다. 안티고노스는 겸손하고 키가 작았으며 들창코였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다른 헬레니즘 국가들과 달리 통치자 숭배가 행해지지 않았다. 친구를 선택할 때 귀족혈통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고려했다. 그는 자신의 군주통치를 통치자로서 자기 의무를 엄격히 이행한다는 철학적 의미로 이해했다. 한번은 아들이 몇몇 신하들을 마구 대하는 것을 보고 그는 "우리의 왕좌가 고귀한 머슴의 신분(endoxos douleia)인 것을 너는 모르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핏 모순되는 것 같은 이러한 군주정 개념에 따르면 통치자는 자기 직분을 책임지고 백성과 법률에 봉사하는 존재였다. 젊은 시절에 안티고노스는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의 제자였다. 그는 아테네에서 제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BC 276년에는 제논을 마케도니아의 펠라에 있는 자신의 궁정에 초대했다. 그러나 제논은 초대에 응하지 않고 대신 제자들인 페르사이오스와 테베인(人) 필로니데스를 보냈다. 페르사이오스는 왕권에 관한 논문을 썼고 안티고노스의 아들 할키오네오스를 가르쳤으며 BC 244년 코린트의 사령관이 되었다. BC 263년에 제논이 죽자 왕은 탄식을 하면서 자신의 공적 활동에 대해 가치 있는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잃었다고 애석해 했으며, 아테네인들을 설득하여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도록 했다. 그의 궁정에 머문 문인들은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 널리 읽힌 천문학에 관한 교훈시 〈파이노메나 Phaenomena〉를 쓴 실리시아 태생의 시인 아라토스, 피로스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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