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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I,(영) Valentinian Ⅰ. 정식 이름은 Flavius Valentinianus. 321~ 375. 11. 17 하(下)판노니아 브리게티오]는 로마의 황제(364~375 재위)이다. 게르만족의 침공을 능란하게 방어해 로마 제국 서부지방의 국경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고트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쳐들어와, 로마 제국은 큰 충격을 받는다. 발렌스 황제. 형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하여 공동 황제에 임명, 제국의 동방을 통치했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역시, 철학적 개념이 없는 철저한 군인 이었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 그의 동생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종교평등 정책 들이 폐기되었다. 9일 뒤 군지휘관들은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발렌티니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3월 28일 그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쪽 절반을 맡아 다스리게 하는 한편, 자신은 제국의 서쪽을 다스렸다. 두 형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으며, 발렌스와는 달리 발렌티니아누스는 통치를 마칠 때까지 이 합의를 지켰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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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렌티니아누스 1세 [Valentinianus I,(영) Valentinian Ⅰ. 정식 이름은 Flavius Valentinianus. 321~ 375. 11. 17 하(下)판노니아 브리게티오]는 로마의 황제(364~375 재위)이다. 게르만족의 침공을 능란하게 방어해 로마 제국 서부지방의 국경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고트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쳐들어와, 로마 제국은 큰 충격을 받는다. 발렌스 황제. 형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의하여 공동 황제에 임명, 제국의 동방을 통치했다. 요비아누스와 그 뒤를 이은 역시, 철학적 개념이 없는 철저한 군인 이었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 그의 동생 발렌스의 치세에 율리아누스의 모든 종교평등 정책 들이 폐기되었다. 판노니아(중부 유럽)에 주둔하던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발렌티니아누스는, 군대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복무했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0~363 재위) 휘하의 군사 호민관으로 있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내 고집해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363)에 참여했으며, 율리아누스의 후계자인 요비아누스(363~364 재위)는 그를 진급시킨 직후 세상을 떠났다(364. 2. 17). 9일 뒤 군지휘관들은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발렌티니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3월 28일 그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제국의 동쪽 절반을 맡아 다스리게 하는 한편, 자신은 제국의 서쪽을 다스렸다. 두 형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으며, 발렌스와는 달리 발렌티니아누스는 통치를 마칠 때까지 이 합의를 지켰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과시하면서 국경수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365년 1월 갈리아 지방에 주둔해 있던 휘하 장군들이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알레마니족에게 패배했다. 그러자 발렌티니아누스는 10월까지 파리에 저택을 짓고, 거기에 거주하면서 침략자들에 대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의 장군인 요비누스는 침략자들을 3차례나 무찔렀다. 두로카탈라우눔(지금의 프랑스 샬롱쉬르마른)에서 벌어진 3차 전투에서 요비누스는 알레마니족을 격파해 그후 여러 해 동안 갈리아 지방을 안전하게 했다. 한편 367년 황제는 작센족과 픽트족 및 스콧족 침략자들에 맞서 브리튼(브리타니아)을 지키고 있던 로마 장군 테오도시우스(나중에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와 더욱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암비아니(지금의 프랑스 아미앵)로 옮겼다.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강화하기 위해 발렌티니아누스는 당시 9세인 아들 그라티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언했다(367. 8. 24). 2개월 뒤 발렌티니아누스는 트리어(지금의 독일에 위치)에 거처를 정하고 7년 동안 머물면서, 라인 강변의 면밀한 방어체계 구축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375년 콰디족이 판노니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는 시르미움(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공화국 스렘스카미트로비차)으로 달려갔다. 그는 여기에 도착한 직후 병에 걸려 죽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뛰어난 업적을 세웠지만 성급하고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그는 아주 성미가 고약한 인물을 장관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속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교황 다마소 1세는 재위 초기부터 아리우스주의자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황후 유스티나의 정치적인 힘을 업고 중요한 교구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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