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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티니아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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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Justinianus I)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이다. 일리리쿰의 농촌출신으로서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백부 유스티누스 1세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어 가서, 제국 통치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백부의 죽음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측근들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원형경기장의 무희 출신이었던 황후 테오도라의 뛰어난 조언은 황제의 정책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황후 테오도라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주민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에서의 이단인 ‘단성론(單性論)’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황제의 종교정책이 로마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1. * 넘겨주기비잔티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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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Justinianus I)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이다. 일리리쿰의 농촌출신으로서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백부 유스티누스 1세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어 가서, 제국 통치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백부의 죽음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측근들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원형경기장의 무희 출신이었던 황후 테오도라의 뛰어난 조언은 황제의 정책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황후 테오도라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주민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에서의 이단인 ‘단성론(單性論)’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황제의 종교정책이 로마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게르만 민족 대이동 결과 5세기에 잃은 옛 로마 서방의 영토 재 정복의 꿈을 실현시킬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환관 나르세스를 기용하여, 반달 전쟁(533∼534) 및 동고트 전쟁(535∼540, 541∼552)을 일으키고, 또한 552년에는 서고트 왕국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카르타고, 이탈리아 및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 지중해를 다시 ‘그들의 바다’로 할 수 있었다. 그 막대한 전비를 처리하기 위해 황제가 국가 재정을 맡긴 사람이 카파도키아의 요하네스였고, 국가 행정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로마법 정비의 임무를 맡긴 사람이 법조가인 토리보니아누스였다. 이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고대 로마 법학자들의 ‘학설집’, ‘법학 입문’ 및 법전 편찬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신법’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이 완성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위대한 건축 활동가로서, 특히 이시도로스나 안티미오스 등 당대의 으뜸가는 건축가를 발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세웠다. 이런 일체의 활동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인도한 것은, 신으로부터 지상의 모든 일을 위탁받아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동한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은총황제로서의 이념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옛 로마제국의 위세(盛世)를 되찾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그가 벌인 정복사업과 토목, 건축사업들은 제국에 심각한 재정난을 초래하였고, 541에서 543년 사이에는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의 손실을 입었으며, 곧 이어 561년 아바르 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마저 받게 되었다. 그의 사후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등장하였고,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독자적인 행로를 걸어가 완전히 그리스화하게 되었다. 그의 통산 38년 간에 걸친 통치사적을 살펴볼 때, 고대의 전통적인 로마제국의 재흥을 시종일관 겨냥한 그의 이런 사업들은 지금까지는 주로 유스티니아누스 개인의 고립된 야심적 기도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일면에서는 이것이 로마법대전 편찬과 같이 고대로마의 지적유산(知的遺産)의 획기적인 집성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형적으로 그가 비극으로 끝낸 시대 착오적인 외정면(外征面)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역사적 평가를 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틀림없이 변경지방의 이름없는 가문출신의 이 대제가 원대한 야심과 웅대한 시야 그리고 강인한 지력과, 또한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비롯하여 뛰어난 문무양면의 인재를 발굴하여 국 내외 정책에 등용한 높은 안목과 식견에 입각하여 이 시기의 역사 상황에 직면하여 시정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역대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의 선천적이며 숙명적인 정책의 장대(壯大)한 규모에서의 발동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 * 넘겨주기비잔티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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