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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현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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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현 읍성 진해현 읍성의 기록 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성의둘레는 1.325척 4촌이며, 시설물로는 높이 3척의 여장과 적대 6개소, 문이 3개소, 옹성이 2개소, 여장382개소, 우물이 2개 있었다고 합니다. 읍성의 성곽으로 진해읍성의 경우 직사각형으로 된 평지읍성이고 2개의 옹성이 있는데 고지도에서 주 도로인 남,동측에 옹성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치의 경우 성곽의 각이진 곳에 배치를 하고 서측성벽이 동측성벽보다 더 길어서 그곳에 치성을 배치하였습니다. 진해현은 조선 태종13년에 개현이 됩니다. 이전에 현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에 있었던 우산현의 읍치기능을 현 진동면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옮겨오면서 진해현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해동지도에서 본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위 광여도와 달리 성문은 3개(동,서,남문) 성곽에는 여장을 그려 놓았으며 읍성안에는 객사와 아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해동지도가 그려지는 시기는 1750년대 초라고 합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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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현 읍성 진해현 읍성의 기록 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성의둘레는 1.325척 4촌이며, 시설물로는 높이 3척의 여장과 적대 6개소, 문이 3개소, 옹성이 2개소, 여장382개소, 우물이 2개 있었다고 합니다. 읍성의 성곽으로 진해읍성의 경우 직사각형으로 된 평지읍성이고 2개의 옹성이 있는데 고지도에서 주 도로인 남,동측에 옹성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치의 경우 성곽의 각이진 곳에 배치를 하고 서측성벽이 동측성벽보다 더 길어서 그곳에 치성을 배치하였습니다. 진해현은 조선 태종13년에 개현이 됩니다. 이전에 현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에 있었던 우산현의 읍치기능을 현 진동면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옮겨오면서 진해현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사진출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해동지도에서 본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위 광여도와 달리 성문은 3개(동,서,남문) 성곽에는 여장을 그려 놓았으며 읍성안에는 객사와 아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해동지도가 그려지는 시기는 1750년대 초라고 합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광여도에서 본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읍성은 둥글게 조성이 되어 있으며 성문은 1개가 있으며 읍성안에는 좌측으로 창(서창,동창등으로 사용하는 창고) 아사(동헌,내아) 객사가 보이며 우측에는 봉수대가 보이는데 봉수대는 가을포봉수대입니다. 광여도의 경우 1800년대(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19세기 초반) 아사의 위치가 위 해동지도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공이 잘못 그렸는지 아니면 아사가 위치를 옮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872년 지방지에 실린 진해현성의 모습으로 위 두 지도에 비해 조금 더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객사가 가장 가운데 있으며 객사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남문이고 객사좌측이 동문 객사우측이 서문이며 동헌의 경우 객사에서 서측방향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객사 앞에는 외삼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주요 도로를 보면 객사에서 남측으로 내려온 남문이 가장 큰 도로임을 알 수 있고 남문가 동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읍성 밖을 보면 동측과 서측에 숲이 조성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남원읍성과 광양읍성, 상주읍성의 경우 읍성 밖 숲을 조성하였는데 숲은 풍수지리에 따라 음과 양의 기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보림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진해읍성 동과 서측에 있는 숲 또한 풍수지리적 성격을 뛴 비보림입니다. 아래쪽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진해동헌의 경우 현재 진동면 사무소 내에 있는데 진해동헌의 안내판에는 진해동헌은 순조 32년(1832년)에 진해현감 이령모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이전에는 동헌이 없었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진해현의 경우 고려 공민왕때 현으로 승격되고 조선개국과 함께 진해현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동헌의 경우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해동지도(1750년대에)에서는 아사가 표시되어져 있고 광여도(1800년대)에도 아사가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동헌이 분명히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동지도와 광여도, 지방지를 기준으로 봐서 처음에는 서측에 동헌을 건축하고 19세기 초반 서에서 동으로 동헌을 옮기고 1832년에 지금의 동헌자리에 진해현감 이령모가 건립하였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동헌이란 동쪽에 있다고 동헌인데 진해현은 서측에 있으니 서헌인가? 아니고 모두 동헌이라는 고유명사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건립 당시 함께 지어진 건물은 형방소, 이령청, 삼문, 착사, 마방 등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의 경북궁을 설할 때에도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건설한 것처럼 각 지역의 읍치 또한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건설하였습니다. 보통 읍성의 경우 각종 관아들을 주산을 중심으로 남으로 배치하고 때에 따라서 동서로 배치를 하는 것에 비해 진해현의 경우 주산인 취산을 중심으로 동남방향으로 배치를 하였습니다. 명당도의 기준으로 진해읍성을 보면 주산인 취산으로 남측방향으로 좌측인 옥녀봉의 줄기인 외청룡과 우측인 인성산의 줄기인 외백호가 감싸고 있으며 내수구인 태봉천과 진동천이 좌우로 흐르고 있으나 내청룡과 내백호가 없어서 명당으로 하기가 곤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내청룡과 내백호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1872년 지방지에 나온 진해읍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은 비보림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내청룡과 내백호가 진해읍성 좌우에 들어서게 되고 명당 옆에는 해자를 파서 좌우로 물이 흐르게 하여 명당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내수구인 태봉천과 진동천이 만나서 바다로 흘러가는 지점에 산이 있는데 고려시대때 현이었던 우산이다. 이 우산이 풍수에서 안산의 기능을 하여 명당으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분류:읍성 분류:진산성 분류:해산성 분류:진해의 산성 분류: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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