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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읍지(都邑地)는 한 나라의 서울로 삼은 곳이다. 한 국가의 도읍지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아무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왕이 바뀔때마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자신의 출신지를 반드시 수도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백제의 도읍지는 위례성, 웅진, 사비 등이며 문화제는 미륵사지석탑, 정림사지 오층석탑, 금동대향로, 공주의당 금도 보살입상등이 있다. 백제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직산 위례성에서 처음으로 문지(門址, 성을 출입하는 문의 터)가 확인돼 세부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곰나루> 또는 <구마나리>로 불리던 웅진(공주)은 백제 문주왕이 옮겨온 도읍지로, 삼근왕ㆍ동성왕ㆍ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538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고구려의 도읍지는 졸본(오녀 산성) → 국내성 → 평양성으로 옮겨갔다.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지금의 서경(西京)인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고구려의 도읍지(都邑地)에 대하여, 후한서(後漢書)에는 개마현(蓋馬縣)이라 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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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읍지(都邑地)는 한 나라의 서울로 삼은 곳이다. 한 국가의 도읍지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아무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왕이 바뀔때마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자신의 출신지를 반드시 수도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백제의 도읍지는 위례성, 웅진, 사비 등이며 문화제는 미륵사지석탑, 정림사지 오층석탑, 금동대향로, 공주의당 금도 보살입상등이 있다. 백제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직산 위례성에서 처음으로 문지(門址, 성을 출입하는 문의 터)가 확인돼 세부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곰나루> 또는 <구마나리>로 불리던 웅진(공주)은 백제 문주왕이 옮겨온 도읍지로, 삼근왕ㆍ동성왕ㆍ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538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고구려의 도읍지는 졸본(오녀 산성) → 국내성 → 평양성으로 옮겨갔다.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지금의 서경(西京)인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고구려의 도읍지(都邑地)에 대하여, 후한서(後漢書)에는 개마현(蓋馬縣)이라 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 조선을 개국하여 태조(太祖)가 된 이성계는 중엄하고 위세당당한 명실상부한 왕실을 구축하고자, 모든 문무제도를 개폐하고, 그 중에서도 도읍(都邑)을 옮기는 대역사에 착수했다. 대전 계룡산 인근 계룡대 안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 도읍지 건설을 위해 궁궐을 지으려고 1년간 대궐공사를 했던 주춧돌 100여 개 등이 역사문화재로 남아있다. 한양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도읍으로 삼은 곳으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의 수도이다. 한양은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때부터 육백 오십년 도읍지로 정점을 찍은지 오래다 보니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통일 대비로도 최고의 이점이 있는 백 오십년 도읍지인 세종시로 이전을 서둘러야 한다. 분류: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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