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은 주나라의 대부였다. 여수는 비자(非子)를 낳았으나 왕위에 오르지 아니했다. 비자를 책봉하여 附庸으로 삼았다. 秦땅 계곡에 도읍하였고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가 재위 10 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백 (公伯) 이 뒤를 이었다. 공백이 아들 진중 (秦仲) 을 낳고 3 년만에 죽었다. 비자의 증손 진중(秦仲)에 이르러 주선왕(宣왕)이 또 명령하여 대부로 삼았다. 비자는 진중(秦仲)을 낳았으나 역시 왕위에는 오르지 아니했다. 진중은 진장공(莊公)을 낳았으나 이도 왕위에 오르지 아니했다. 진중 (秦仲) 3 년에 주려왕 ( 周厲王) 이 무도하여 제후들 중에서 반란이 있었다. 견융(犬戎)이 성(成)의 종족을 멸하니 선왕이 마침내 비자(非子)의 증손 진중(秦仲)을 대부(大夫)로 임명하고 서융(西戎)을 토벌토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진중 (秦仲)이 융 (戎) 을 물리친 공 에 주나라 왕실이 힘입었다. 반기를 든 서융이 대락 일족을 죽이고 또 주나라 대부가 된 진영의 현손 진중(秦仲)까지 죽였다.
진중은 주나라의 대부였다. 여수는 비자(非子)를 낳았으나 왕위에 오르지 아니했다. 비자를 책봉하여 附庸으로 삼았다. 秦땅 계곡에 도읍하였고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가 재위 10 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백 (公伯) 이 뒤를 이었다. 공백이 아들 진중 (秦仲) 을 낳고 3 년만에 죽었다. 비자의 증손 진중(秦仲)에 이르러 주선왕(宣왕)이 또 명령하여 대부로 삼았다. 비자는 진중(秦仲)을 낳았으나 역시 왕위에는 오르지 아니했다. 진중은 진장공(莊公)을 낳았으나 이도 왕위에 오르지 아니했다. 진중 (秦仲) 3 년에 주려왕 ( 周厲王) 이 무도하여 제후들 중에서 반란이 있었다. 견융(犬戎)이 성(成)의 종족을 멸하니 선왕이 마침내 비자(非子)의 증손 진중(秦仲)을 대부(大夫)로 임명하고 서융(西戎)을 토벌토록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진중 (秦仲)이 융 (戎) 을 물리친 공 에 주나라 왕실이 힘입었다. 반기를 든 서융이 대락 일족을 죽이고 또 주나라 대부가 된 진영의 현손 진중(秦仲)까지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