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호금도, . 1942년 12월 21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이다. 칭화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으며,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일체의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수력발전소에서 근무를 시작, 관리로서의 길을 걸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내 자본가를 잇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켜 ‘붉은 자본가’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 내에서 이른바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던 천산 고속도로의 공사를 마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2006년 3월, 중국 인민들이 해야 할 여덟 가지의 일과 해서는 안 될 여덟 가지의 일을 고시로 표현한 팔영팔치를 제시하여, 경제성장 이후 불거진 양극화 문제와 개인주의의 확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국심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그는 두 차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바가 있는데, 한 번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합작하여 만든 유리 공장을 방문했다.
후진타오(호금도, . 1942년 12월 21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이다. 칭화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으며,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일체의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수력발전소에서 근무를 시작, 관리로서의 길을 걸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내 자본가를 잇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켜 ‘붉은 자본가’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 내에서 이른바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던 천산 고속도로의 공사를 마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2006년 3월, 중국 인민들이 해야 할 여덟 가지의 일과 해서는 안 될 여덟 가지의 일을 고시로 표현한 팔영팔치를 제시하여, 경제성장 이후 불거진 양극화 문제와 개인주의의 확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국심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그는 두 차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바가 있는데, 한 번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합작하여 만든 유리 공장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