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김자점은 일지매에서 천하 만고의 역적이다. 1623년. 서인 세력은 광해군을 폐하고 무능한 능양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을 성공시킨다. 이 서인 세력 속 "무능한 무장"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자점이었고, 그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책록 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임경업 장군이 청군의 남침로인 압록강 부근 평안도의 의주산성과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며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자 도원수 김자점은 "청나라 군대를 먼길을 행군하게 하여 지치게 한 다음 때려잡아야 한다"는 핑계로 임경업 장군과 병사들을 의주산성에서 한참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황해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하여 청군의 남하 길을 열어주었다. 병자호란을 맞아 청나라와 내통을 하는 간자(간첩)여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을 "조선의 도원수 김자점"은 한것이다 거칠것 없이 황해도 까지 밀고 내려온 청군에게 임경업장군의 조선방어군은 "임진강이 청군의 저지 최후의 보루다, 이곳이 뚫리면 한양이 무너지고 조선은 없다"라며 총력 방어전을 펼치려 했으나 "조선 도원수 권한"으로 김자점은 또 조선 방어군의 방어를 교묘히 무력화 시켰으며, 마침내 청군은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한양을 함락하게 된다. 조선의 임금 인조는 한양을 함락한 청군에게 쫏겨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나 조선 조정내 "친청파"의 청나라에 대한 항복 요구대로(명분은 화친이었으나 항복이다) 한강 송파 부근 삼전도에 나가 오랑캐 청군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세번 짖찧으며 절하면서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삼전도의 치욕"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방위를 책임진 도원수로써 김자점의 이러한 행동은 반역이다"라는 여론에 의하여 김자점은 유배에 처해졌으나,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를 왕위에 올린 김자점이라서 1640년 인조에 의하여 1월 강화유수로,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고,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 후에도 인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조선의 권력을 주무르며 청(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임경업장군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인조 후, 병자호란때 볼모로 청국의 심양(현봉천)에 잡혀갔다 8년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한 복수심을 가진 인조의 아들 효종이 임금으로 등극했고, 이 효종은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비밀리에 "북벌"을 계획한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사림(士林) 세력들이 효종에 의하여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의 계획"이 기획되자 친청파 김자점은 위협을 느끼게 되며, 이에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등을 시켜 효종 및 신하들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고, 이로인하여 효종의 북벌 계획은 수포가 되었으며 조선 조정은 더욱 강력한 청나라의 간섭과 감시를 받게 된다. 김자점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조정 대신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된 처지에서도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아들 익(釴)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며 이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라 한다. 김자점의 역모로 김자점 일가는 위로 삼대, 아래로 삼대에 거쳐 반역죄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돼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조정은 김자점이 태어난 집을 만고의 역적 집이라 하여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현재는 저수지로 개축돼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고 이 마을을 현재 "못등"이라고 하며 김자점이 태어난 집은 옛날에는 낙안땅이었으나 지금은 벌교읍에 속해 있다. 정리하면, 김자점은 오랑캐 청에게 두번씩이나 자신이 대신으로 있는 조선왕조를 팔아먹었고(크게 보아서 두번이지 세세하게 보면 두번이 넘는다) 인조 반정으로 한번......청나라에게의 내통 그 죄를 묻는 조정에게 또 한번, 도합 두번의 역모를 저지른 "만고의 역적"이라는 칭호가 전혀 무거웁지 않은 자이다. 조선시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역적의 대명사며 "천하 만고의 역적" 김자점에 대한 전설이 많으나 그 중 한편을 옮겨 본다. 조선조 전라도 땅 낙안 고을에는 해마다 15살 가량의 숫처녀를 마을에 자리잡은 당집에 제물로 받쳐야만 낙안 고을이 무사하여 해마다 숫처녀를 제물로 하는 제를 지내 오고 있었다 제물로 바친 처녀가 숫처녀가 아니거나, 아니면 제물로 처녀를 바치지 않거나, 제를 지내는데 있어 부정을 타면 어김없이 무었인가에 의하여 낙안고을은 무시 무시한 보복을 당했고, 해서 낙안 고을의 딸자식 가진 주민들은 해마다 제물로 바쳐질 처녀를 제비뽑기로 선출하여 제를 지내게 됀다. 이렇듯 못됀 풍습이 있는 낙안 고을에 모 사또가 부임하여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며 제를 지내던 당집을 헐어 버린다. 사또가 친히 지휘하여 당집을 허물때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어났고 당집의 대들보에는 커다란 지네란 놈이 매달려 당집 허무는 것을 방해를 했는데, 사또는 지금까지 숫처녀를 제물로 받아먹은 놈이 바로 이 지네구나 하여 장검을 빼어 지네를 마디 마디 토막을 내어 버렸다. 본시 지네란 놈은 몸이 끊어져도 다시 살아나는 놈이라 하여 사또는 토막을 낸 거대한 지네를 후환을 없앨 요량으로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끓이게 하여 완전히 죽여 버렸다. 그런데 지네를 장검으로 토막 낼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의 붉은피가 튀어 빨간 얼룩이 져 있었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 지지 않아 몹시 불쾌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사또의 양미간에 튄 지네 피의 붉은 얼룩이 자연이 없어졌고 지네 사건은 잊어버렷는데.......... 그런데 어느날 사또의 부인이 수태를 하게된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 아이였다. 그런데.......태어난 아이의 양미간에는 피처럼 붉은 점이 진하게 하나 박혀 있었고, 그점은 사또가 당집 대들보에 매달려 있던 지네를 토막내 죽일때 튄 지네 핏자국의 얼룩 그대로 였으며 위치 또한 똑갇았다. 사또는 불길한 징조라 전전긍긍 하면서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럭저럭 불길하다 느끼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지냈으며, 아이의 이마 붉은점은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또는 "붉은 점"이라는 뜻의 자점(紫點,자줏빛 자紫)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네가 김자점 부친의 칼에 맞아 죽으면서 김자점 부친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가졌고, 지네의 그 원한은 김자점을 태어나게 하여 원한의 대상인 김자점 부친 가계를 몰살 시킴은 물론(김자점 포함)나아가 조선을 물말아 먹도록 하도록 하였다는 김자점 탄생의 야담이 있다. 분류:일지매 분류:지네 분류:조선의 공신 분류:정사공신 분류:점자 분류:인조 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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