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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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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아누스 [Julianus,(영) Julian. 본명은 Flavius Claudius Julianus. 별칭은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the Apostata). 331/332 콘스탄티노플~ 363. 6. 26/27 메소포타미아 크테시폰]은 로마 황제(361~363 재위)이다. 로마제국 후기의 황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황제들 가운데서는, 마지막 황제였다. 배교자로 불리는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교묘하게 탄압하면서 이교 부흥을 위해서 노력한다. 원래 기독교도였던 그가 이교 숭배자로 변절하자 기독교인들은 그를 배교 황제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였으며, 유명한 학자이자 군사지휘관으로 자기 부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리스도교를 완강하게 적대시하고 공공연하게 이교도로 개종을 선언해(361)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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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아누스 [Julianus,(영) Julian. 본명은 Flavius Claudius Julianus. 별칭은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the Apostata). 331/332 콘스탄티노플~ 363. 6. 26/27 메소포타미아 크테시폰]은 로마 황제(361~363 재위)이다. 로마제국 후기의 황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황제들 가운데서는, 마지막 황제였다. 배교자로 불리는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교묘하게 탄압하면서 이교 부흥을 위해서 노력한다. 원래 기독교도였던 그가 이교 숭배자로 변절하자 기독교인들은 그를 배교 황제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였으며, 유명한 학자이자 군사지휘관으로 자기 부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리스도교를 완강하게 적대시하고 공공연하게 이교도로 개종을 선언해(361)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 2번째 부인 바실리나 사이에 난 작은 아들이었다. 그가 5세 때 사촌인 콘스탄티우스는 동부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가 되었고, 340년에 그의 형 콘스탄티누스 2세가 죽자 단독황제가 되었다. 군(軍)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들만을 그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형제들과 다른 가능한 후보자들을 살해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셋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337년 또는 그 직후에 율리아누스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341년에는 율리아누스의 맏형이 살해되었다. 어머니 바실리나도 율리아누스의 출생 직후 죽었기 때문에 고아 신세가 된 그는 처음에는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에 의해 비티니아에서 양육되다가 이후에 카파도키아에 있는 마켈룸의 외진 땅에서 자랐다. 19살 되던 해 콘스탄티우스 2세의 부인 유세비아의 후원으로 허락을 얻어 처음에는 코모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그리스에서 교육을 계속 받았다. 그와 동시대의 전우였던 암미아누스 마르케리누스는 그의 신체적 외양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중키에 머리카락이 빗질한 것처럼 부드럽고 턱수염은 거칠고 뾰족했다. 아름답고 빛나는 눈은 영민한 정신을 나타냈다. 눈썹이 잘생기고, 코가 우뚝했으며, 입은 큰 편으로 아랫입술이 처져 있었다. 목은 굵고 약간 굽었으며, 힘이 세고 달리기를 잘했다." 루브르에 있는 그의 조상은 이러한 묘사와 대체로 부합되며 체격이 탄탄하고 수줍어하는 듯한 철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학생으로서 율리아누스가 누린 자유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당대 최초로 문화적 교양을 지닌 황제가 탄생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페르가몬·에페소스·아테네 등지에서 공부했고, 신플라톤주의에 이끌렸으며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의 숭배를 받아들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작들은 상당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며, 대부분 그리스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도로 영세받고 양육되었으며, 최고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외견상으로는 그리스도교에 따르는 태도를 보였지만, 공식적인 가면 뒤에 숨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그가 보기에 자기 아버지와 형과 무수한 친척들을 살해한 자들의 종교였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는 철학적 사색에서 훨씬 더 많은 위안을 얻었다. 이러한 반응은 때로 자연스럽기는 해도 비정상적인 태도인 것처럼 해석되어왔다. 자연스러운 것은 맞지만 율리아누스 혼자서만 유별나게 그리스도교보다 헬레니즘을 선호했다고 보는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율리아누스가 익숙하게 몸담고 있었던 사회, 특히 교양인들의 사회는 실제로 이교도들이 지배적이지는 않았더라도 여전히 많이 있었다. 심지어는 주교들조차도 자신들의 그리스어 교양을 자랑했다. 율리아누스의 검소하고 정숙한 태도와 그리스 문화유산에 대한 열광이 그 사촌의 신하들 다수에게서 동조적인 반응을 얻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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