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센티우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312]는 로마의 황제(306~312 재위)이다.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퇴위한 뒤 새로운 사분(四分) 통치체제(황제 2명이 각각 1명씩 부황제를 거느린 체제)가 수립되었을 때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게 밀려났다. 세베루스는 부황제가 된 뒤 306년 황제가 되었으나 세베루스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로마인들은 306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막센티우스를 돕기 위해 제위(帝位)에 복귀한 막시미아누스는 307년 싸움에서 이겨 세베루스를 죽였으나 그무렵 아들과 사이가 나빠져 이전에 그가 황제로 지명했던 콘스탄티누스에게 도망갔다.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스페인·아프리카를 다스렸지만 308년에 아프리카의 비카르[太首]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으며 2년 뒤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스페인을 합병했다. 311년에는 아프리카를 다시 손에 넣었지만 이듬해 312년 밀비아누스교(橋)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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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센티우스 [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312]는 로마의 황제(306~312 재위)이다.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퇴위한 뒤 새로운 사분(四分) 통치체제(황제 2명이 각각 1명씩 부황제를 거느린 체제)가 수립되었을 때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에게 밀려났다. 세베루스는 부황제가 된 뒤 306년 황제가 되었으나 세베루스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로마인들은 306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막센티우스를 돕기 위해 제위(帝位)에 복귀한 막시미아누스는 307년 싸움에서 이겨 세베루스를 죽였으나 그무렵 아들과 사이가 나빠져 이전에 그가 황제로 지명했던 콘스탄티누스에게 도망갔다. 막센티우스는 이탈리아·스페인·아프리카를 다스렸지만 308년에 아프리카의 비카르[太首]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으며 2년 뒤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스페인을 합병했다. 311년에는 아프리카를 다시 손에 넣었지만 이듬해 312년 밀비아누스교(橋)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312년, 권력에 굶주린 두 명,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는 서방제국의 통치권을 차지하려고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소문에 의하면 독재자이자 찬탈자인 막센티우스는 순전한 악의 화신이며 마법사 노릇을 하고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고 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312년 10월 28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가 10월 27일 콘스탄틴황제가 꿈과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로마 근교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이벌인 막센티우스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물리친 기념으로 기원후 315년 세웠답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 로마의 티베르강에서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서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의 황제 막센티우스를 쳐서 하나의 나라로 다시 통일하게 된다. 당시의 기록들은 콘스탄티누스를 옹호하기 위해 막센티우스를 잔인한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막센티우스는 그리스도교도 박해를 중지시켰으며 로마 광장에 아들 로물루스를 위해 신전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가 건축한 장대한 바실리카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 막센티우스의 바실리카는 야외음악당 같은 느낌이다. 실재로는 재판과 상거래가 행해지던 장소라고 한다.막센티우스 황제의 명으로 착공.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완공.지진과 약탈로 지금은 저렇게 3개의 아치형 천장만이 남아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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