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dbkwik:resource/Hui4VIzO_dn0XgJqGoFe7w==   Sponge Perma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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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라곤의 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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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umb|right|아라곤의 캐서린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스페인어: Catalina de Aragón, 1485년 12월 16일 ~ 1536년 1월 7일)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넷째딸로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정비이자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의 어머니이다.
  •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아라곤의 캐서린은 스페인의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우고 유럽 국가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진출함으로써 명실 공히 그 시대의 유럽에서 최고의 커플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Ⅱ of Aragon)와 이사벨라 여왕(IsabellaⅠ of Castille)의 다섯 자녀 중의 막내이다. 그녀는 친할머니로부터 잉글랜드의 왕가인 랭커스터가의 혈통을 이어받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인 헨리 7세와는 8촌간이었으며 왕비인 엘리자베스와도 인척관계에 있었다. 캐서린은 키는 상당히 작았지만 눈부시게 밝은 금발과 커다란 푸른 눈과 투명한 피부와 우아한 기품을 갖춘 여인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라틴 문학, 역사, 법학 등에 조예가 깊은 교양 있는 여인이었다. 또한 ‘카톨릭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은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을 본받아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는 성기사단(Holy Order) 소속의 선생들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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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아라곤의 캐서린은 스페인의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우고 유럽 국가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진출함으로써 명실 공히 그 시대의 유럽에서 최고의 커플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Ⅱ of Aragon)와 이사벨라 여왕(IsabellaⅠ of Castille)의 다섯 자녀 중의 막내이다. 그녀는 친할머니로부터 잉글랜드의 왕가인 랭커스터가의 혈통을 이어받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인 헨리 7세와는 8촌간이었으며 왕비인 엘리자베스와도 인척관계에 있었다. 캐서린은 키는 상당히 작았지만 눈부시게 밝은 금발과 커다란 푸른 눈과 투명한 피부와 우아한 기품을 갖춘 여인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라틴 문학, 역사, 법학 등에 조예가 깊은 교양 있는 여인이었다. 또한 ‘카톨릭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은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을 본받아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는 성기사단(Holy Order) 소속의 선생들에게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결과였다. 1501년 가을, 열다섯 살인 캐서린은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자신의 남편인 잉글랜드의 태자 아서 튜더(Arthur, Prince of Wales)를 처음 만나기 위해서 쉽지 않은 항해를 한 것이다. 캐서린이 여덟 살일 때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는 스페인의 공동통치자인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 조약(Treaty of Medina Del Campo)을 체결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양국의 무역 관세를 철폐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조약에 포함된 의무조항 중의 하나가 아더와 캐서린의 결혼이었다. 캐서린은 조약이 체결된 직후 스페인에서 남편이 참석하지 않은 채 궐석결혼을 올려 아더의 부인이 되었다. 아더는 캐서린보다 아홉 달 늦게 태어났다. 당시의 교회법이나 사회 관례상 열다섯 살이 되어야 성인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녀는 아더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정식 결혼을 위해서 이제 막 잉글랜드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년 전부터 아더와 캐서린은 라틴어로 쓴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라 상당히 격식을 차린 것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서로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갔다. 이 어린 부부가 처음 만나고 나서 캐서린이 아더에 대해 느낀 감정은 기록이 남지 않았지만 아더는 무척 만족한 듯 장모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 ‘진실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했으며 아버지 헨리 7세에게 캐서린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큰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더와 캐서린의 결혼은 1501년 11월 14일에 런던의 성 베드로 성당(St. Paul's Cathedral)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어린 부부는 결혼식 이후 아더의 영지인 웨일즈에 위치한 루들로우 성(Ludlow Castle)에 자리를 잡았다. 국가 간의 조약에 의해 강제적으로 결혼이 결정된 순간부터 국내외에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던 말 많은 결혼이었지만 그러한 여론이 무색하게 이 어린 부부가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행복한 날들을 보내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 행복도 몇 달 뿐이었다. 이 부부는 동시에 ‘영국 땀병(English Sweate)’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함께 자리에 누웠다. 며칠 후에 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캐서린뿐이었다. 헨리 7세는 대단히 유능한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리처드 3세의 누이동생이 주축이 된 요크가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지만 이를 잘 극복한 다음 잉글랜드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서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양왕국의 기초를 닦았던 사람이다. 그는 그 시절에 이제 막 시작한 스페인의 신대륙 개척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미래 역시 바다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던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캐서린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치 역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캐서린은 당연히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헨리7세는 그녀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대신 그녀와 아더의 동생인 요크 공작 헨리(Henry, Dule of York)와의 결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후일 헨리 8세(HenryⅧ)가 되는 이 작은 헨리는 원래 카톨릭 신부의 길을 가려고 작정하고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경건하고 모범적인 소년이었다. 나이는 캐서린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동생을 과부가 된 형수와 결혼시키려고 하는 헨리 7세의 이 시도는 당시의 교회법 체계에서 이 결혼이 엄연히 ‘근친결혼’에 해당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교황에 대해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여왕도 막내딸이 과부가 되어 돌아오는 것보다는 잉글랜드에서 다시 한 번 결혼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듯 헨리 7세의 제안에 동조해서 교황에게 갖가지 압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결혼허가를 얻는 과정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결국 14개월 만에야 결혼허가는 받아냈는데 이번에는 작은 헨리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이 결정되었다면 불만을 표시했다. 이것도 그가 캐서린을 좋아하게 되면서 가까스로 진정되자 이번에는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동맹관계가 흔들렸다. 더욱이 아더가 죽은 바로 다음 해 말 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가 늦은 나이에 어렵게 출산을 하다 사망하자 국왕 헨리 7세가 마치 은둔하는 수도자처럼 자신의 내면세계로 침잠해 버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헨리 7세가 죽는 날까지 작은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이루지지 않았다. 헨리 7세는 극심한 슬픔을 가지고 살다가 결국 심장질환으로 사망하고 헨리 8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고 나서 그 다음 해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도 왕실의 공식행사가 아니라 그들만의 개인적인 행사로 조촐하게 치렀다. 이때 헨리가 열여덟 살, 캐서린은 스물네 살이었다. 1509년 6월 헨리가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잉글랜드 국민 전체가 열광했다. 이 행사 자체가 수십 년 만에 잉글랜드에서 왕위 계승을 위한 내전이 완전히 종식됐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토피아(Utopia)의 저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경은 이 날의 광경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오늘은 우리들의 노예생활이 끝나고 슬픔이 끝나고 기쁨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 캐서린은 아직 헨리와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몸이었지만 잉글랜드의 왕비 자격으로 신민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옷을 입고 크게 웨이브 진 긴 금발을 늘어뜨린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스페인의 공주는 이 뜻 깊은 날에 가장 눈부신 존재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관계는 그저 금슬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유별나게 좋았다고 한다. 헨리 8세는 그의 치세보다도 결혼을 여섯 번이나 하고 두 명의 부인을 참수형에 처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엄청난 난봉꾼으로 그려지지만 역사적 실존 인물인 헨리 8세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성격이 변덕스럽고 다혈질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여자들을 마다하지도 않았지만 심각한 외도 경력은 두 번 정도였으며 이 두 번 모두 캐서린 왕비와 관련해서 후계자 문제가 심각하게 가시화된 다음부터 앤 볼윈(Anne Boleyn)과의 두 번째 결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실질적으로는 홀몸이었던 기간에 발생했던 사건이었다. 사실 헨리 8세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인물이었고 여자들이 그를 보면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나이를 들어서는 비만 증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키가 180cm를 훨씬 넘는 장신인데다 호남형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승마와 사냥과 춤에 능숙했다. 전투 기술도 수준급이었고 어릴 적에는 수도사가 되려고 공부를 무척 많이 했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박식하고 특히 말재주가 아주 좋았다. 그는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고 시와 소설까지 썼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헨리 8세는 개인적인 매력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워낙 성격이 급해서 충동적인 결정을 많이 내렸기 때문에 정책적인 오류를 자주 범하곤 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의 머릿속에는 경제 개념이 아예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정반대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 재위기간 내내 잉글랜드 의회를 무척 괴롭혔다. 헨리 7세는 개인재산의 관리에도 철저했던 사람이어서 그가 아들에게 개인적으로 물려준 유산은 150만 파운드를 넘었는데 현재 기준으로는 수십 억 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이 개인 재산을 불과 몇 년 만에 모두 탕진하고 국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치 스타일이 문제였다. 그는 공적인 참모들과 사적인 친구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애매한 관계의 친구들을 잔뜩 모아놓고 하루가 멀다 하고 초호화판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캐서린이 연이어 아이를 사산하거나 어려서 잃는 불행을 겪으면서 행복했던 결혼생활에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다. 그녀는 결혼한 바로 그 해에 처음 임신했다 사산했고 그 다음 해에는 아들을 낳아 헨리(Henry)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으나 이 어린 헨리는 불과 52일 밖에 살지 못했다. 캐서린이 세 번째 아이까지 잃게 된 데는 헨리 8세의 책임이 적지 않았다. 1513년 캐서린의 세 번째 임신 중에 헨리는 프랑스에 군사원정을 단행했다. 그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었다. 당시 남부 유럽은 역사학의 용어로는 ‘이탈리아 대전쟁’이라고 하는 잔인한 기간이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탈리아를 무대로 전쟁과 협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1513년의 전쟁은 교황령과 베네치아 공작령의 영토분쟁으로 시작되어 다시 한 번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이 전투에 잉글랜드가 개입할 명분은 전혀 없었다. 의회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스페인이 자신의 처가라는 사실을 명분으로 내세워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모험을 감행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단지 헨리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데 그가 가장 존경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Ⅱ)이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의 돌발적인 군사행동은 잉글랜드 의회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저항이 거셌는데 특히 스코틀랜드의 반발이 거셌다.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James Ⅳ)의 왕비는 헨리의 누나인 마가렛(Margaret)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스코틀랜드는 이백 년이 넘게 프랑스와의 ‘구 동맹(Auld Alliance)’에 묶여있는 처지였다. 이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이 동맹이 아니었다면 스코틀랜드는 일찌감치 잉글랜드에게 병합되었을 것이다. 제임스 4세는 헨리에게 군사적인 모험을 재고하라고 지속적으로 권고했지만 헨리는 국내의 통치를 캐서린에게 위임하고 나서 기필코 프랑스 원정에 나서고 말았다. 그러자 제임스 4세도 어쩔 수 없이 잉글랜드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했다. 헨리는 그의 아버지 시대에 이루어 놓은 평화적인 분위기로 인해서 스코틀랜드가 군사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제임스 4세는 말로만 엄포를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3만 명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서 곧장 남하했다. 이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사람은 캐서린이었다. 그녀는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영주들의 병사들을 모두 긁어모아 2만6천 명의 병력으로 방어군을 편성하고 서레이 공작 토머스 하워드(Thomas Howard, Earl of Surrey)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전투는 그해 9월 당시로서는 잉글랜드 영토의 최북단인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공작령에 있는 플로덴 평원(Flodden Field)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운명의 날 잉글랜드의 악명 높은 안개가 플로덴 평원을 덮쳤다. 높은 고원지대에서 생활하며 청명한 하늘에 익숙한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그저 악몽일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환경을 최대한 이용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기습공격이 감행되었고 스코틀랜드군은 9천 명 이상의 전사를 내고 퇴각했다. 플로덴 전투의 와중에 제임스 4세가 실종되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서 잉글랜드군은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폈다. 그 결과 피가 범벅이 된 스코틀랜드 국왕의 외투를 발견했다. 캐서린은 이 외투를 프랑스에 있던 헨리에게 보냈다. 이 뜻밖의 승리에 의회와 국민들은 열광했다. 자칫하면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크게 잃을 뻔 했던 헨리의 군사적인 모험은 엉뚱하게 플로덴 전투의 승리로 인해서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러나 캐서린은 승리에 대한 대가를 크게 치러야했다. 그동안 런던에서 고군분투했던 그녀는 과중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조기출산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헨리는 다급하게 귀국했다. 그러나 조산된 남자 아이는 몇 시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다음 해의 임신 역시 사산으로 이어졌다. 캐서린은 1516년 2월에야 건강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후일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될 메리 1세(MaryⅠ)였다. 이탈리아 전쟁이 오래 지속되고 강력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서쪽으로 밀고나오자 유럽 열강의 군주들은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520년 스페인을 통치하는 카를 5세(CharlesⅤ)가 잉글랜드를 국빈방문한 데 이어 잉글랜드와 프랑스도 극적인 화해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유럽사에서는 1520년 6월에 열렸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평화회담을 ‘황금 옷의 전쟁터(Field of Golden Cloth/le Camp du Drap d'Or)’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당시 대륙에 남아있던 잉글랜드의 마지막 영토인 깔레(Calais)에서 남서쪽으로 16km 떨어진 작은 마을 발링헴(Balinghem)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경이었다. 이곳에서 두 국왕은 초호화판 회담을 보름 동안이나 거행했다. 이 기간 동안 두 나라는 자존심 대결을 벌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사치를 총동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캐서린은 이 회담에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 잉글랜드 왕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지만 내막 적으로는 큰 갈등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캐서린은 메리를 낳고 2년 후에 다시 사산으로 이어진 마지막 임신을 끝으로 더 이상 임신을 하지 못했으며 건강도 그리 좋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여섯 명의 자녀 중에서 다섯을 일찌감치 잃은 그녀는 점차 신앙생활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동안 성실한 남편이었던 헨리는 캐서린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후계자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시의 잉글랜드에는 왕위 계승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튜더 왕조는 성립되고 단 두 명의 왕을 배출했을 뿐이었다. 헨리의 전 세대까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잉글랜드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장미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시기였다. 현재의 후계자라고는 메리뿐인데 이전의 잉글랜드 역사에서 12세기 초반에 여성 후계자 문제로 인해서 크게 홍역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세웠던 정복자 윌리엄(WilliamⅠ, the Conqueror)의 아들이자 이 왕조의 제2대 국왕인 헨리 1세는 재위기간 중에 자유헌장(Charter of Liberty)을 제정하고 왕국의 법령을 정비한 유능한 국왕이었는데 그가 죽자 적법한 자녀라고는 신성로마제국황제와 결혼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당차고 똑똑한 딸 마틸다(Matilda/Maude of England)만 남아있었다. 그녀가 후계자로 결정되자 여왕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출현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은 20년간이나 내전에 휩싸였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헨리는 대단히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이 자신에게 남성 후계자를 허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불경한 결혼, 다시 말하면 형의 아내와 혼인한 ‘근친결혼’에서 찾았다. 1525년 그는 캐서린은 물론 측근들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Ⅶ)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과 캐서린의 결혼을 승인한 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1509년 교지는 잘못된 것이었으므로 이를 무효로 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이 펄쩍 뛴 것은 당연했다. 이십 년 가까이 건실한 남편과 현명한 아내로 살아온 부부였다. 캐서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비록 스페인 출신이지만 신앙심, 우아함, 지성, 선량함이 어우러져 잉글랜드 국민들의 애정을 많이 받고 있던 왕비였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서도 스스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마하면서 학자들에게도 많은 투자를 했다. 그녀로 인해서 잉글랜드에서는 여성 교육에 대한 열풍이 불 정도였다. 헨리는 교황에게 집요하게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캐서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헨리 8세에게는 평생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는 캐서린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그는 왕위가 메리에게 넘어갈 경우 잉글랜드에는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왕위계승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혼 요구는 나날이 강도가 높아졌다. 이 와중에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앤 볼윈(Anne Boleyn)과 국왕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캐서린의 시종녀(Lady in waiting/Maid of honour)로 여러 해 동안 일하고 있었는데 왕궁의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띠는 존재였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헨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캐서린을 심정적으로 동정했다. 앤이 국왕과 가까워지자 차마 국왕을 비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화살을 앤에게 돌렸다. 그녀를 건실한 가장을 유혹해서 모범적인 가정을 파탄내고 선량한 부인을 핍박하는 요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thumb|right|아라곤의 캐서린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스페인어: Catalina de Aragón, 1485년 12월 16일 ~ 1536년 1월 7일)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넷째딸로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정비이자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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