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금정 산성은 조선시대의 석성이다. 숙종 29년(1703) 경상감사 조태동이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증보문헌비고>와 <동래읍지>에 나온다. 그 이전의 기록에도 금정산성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한참 앞서는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파괴하였으나 1972년과 1989년에 복원하였다. 총 길이는 17km에 이르며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져있는데, 현재는 4km의 성벽이 남아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세 읍에 소속된 군사와 승려들이 차출되어 수비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 해상방어를 목적으로 쌓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고종 4년(1867) 동래부사로 부임한 정현덕이 금정산성의 성문을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찾다가 사제지간에게 건축을 맡겼다. 동문은 스승에게 맡기고 서문은 제자에게 맡겼는데, 스승은 웅장하게 세우고 싶었고 제자는 아름답게 세우고 싶었다. 제자가 서문을 완성하고 스승을 찾아가자 스승은 문도 달지 못한 상태였다. 스승은 제자의 솜씨를 시기하였다. 사람들이 제자의 솜씨를 칭찬하였으나 제자는 스승을 도와 동문을 함께 완성하였다. 뒤에 두 사람은 밀영의 영남루공사를 함께 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약 17km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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