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리 계곡은 만주 화룡현 청산리의 계곡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청산리 80리계곡으로 일본군을 유인했고, 좁은 계곡으로 몰린 일본군을 일시에 섬멸하였습니다. 군정서 부대는 송림평의 전투 예정지역에서 골 안쪽의 백운평의 소수병력에 유리한 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한다. 80리 계곡에서 1주일동안 일본군 5000여명을 맞아 10여 차례의 대공방전 끝에 3300여명의 일본군 살상이라는 쾌거를 식민지 조국에 안겨주었지만,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30년 추운 겨울 한 밀정의 흉탄에 이국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80리 계곡은 만주 화룡현 청산리의 계곡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청산리 80리계곡으로 일본군을 유인했고, 좁은 계곡으로 몰린 일본군을 일시에 섬멸하였습니다. 군정서 부대는 송림평의 전투 예정지역에서 골 안쪽의 백운평의 소수병력에 유리한 지역으로 옮겼다고 한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한다. 80리 계곡에서 1주일동안 일본군 5000여명을 맞아 10여 차례의 대공방전 끝에 3300여명의 일본군 살상이라는 쾌거를 식민지 조국에 안겨주었지만,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30년 추운 겨울 한 밀정의 흉탄에 이국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