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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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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사 [道士,Taoist Community, Master of]는 원래는 도술(道術)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나, 나중에 도교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도사는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도교를 믿고 수행하거나 도의를 득한 도사는 도의 선생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 〈春秋繁露〉 순천지도편(循天之道篇)에 나오는 '고지도사'(古之道士:옛날의 도사)라는 말과 한서 〈漢書〉 왕망전(王莽傳) 하편에 나오는 '도사서문혜군'(道士西門惠君) 등은 모두 도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도교에서 고대의 신선방술(神仙方術)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후로 도교신도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도사는 '황관'(黃冠)·'우사'(羽士)·'우객'(羽客)·'우의'(羽衣)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여자도사는 '여관'(女冠)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경전(經典)과 도교계율에 능통한 도사를 '법사'(法師) 또는 '율사'(律師)라고 하며, 수양을 많이 쌓고 덕망있는 도사를 '연사'(煉師)라고 한다. 그리고 위의(威儀)에 숙달된 도사를 '위의사'(威儀師), 도행이 넓고 깊은 도사들을 '선생'(先生)·'진인'(眞人)이라 부른다. 경전을 익힌 정도에 따라 도사 사이에도 다른 등급과 호칭을 두고 있다. 송대(宋代) 이후로 도사에는 출가도사(出家道士)와 재가도사(在家道士)의 구분이 생겼는데, 도관(道觀:도교사원)에 거주하며 결혼하지 않은 채 종교생활에 전념하는 전진파(全眞派)의 도사를 출가도사, 결혼할 수 있는 정일파(正一派)의 도사를 재가도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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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사 [道士,Taoist Community, Master of]는 원래는 도술(道術)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였으나, 나중에 도교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도사는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도교를 믿고 수행하거나 도의를 득한 도사는 도의 선생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 〈春秋繁露〉 순천지도편(循天之道篇)에 나오는 '고지도사'(古之道士:옛날의 도사)라는 말과 한서 〈漢書〉 왕망전(王莽傳) 하편에 나오는 '도사서문혜군'(道士西門惠君) 등은 모두 도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도교에서 고대의 신선방술(神仙方術)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후로 도교신도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도사는 '황관'(黃冠)·'우사'(羽士)·'우객'(羽客)·'우의'(羽衣)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여자도사는 '여관'(女冠)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경전(經典)과 도교계율에 능통한 도사를 '법사'(法師) 또는 '율사'(律師)라고 하며, 수양을 많이 쌓고 덕망있는 도사를 '연사'(煉師)라고 한다. 그리고 위의(威儀)에 숙달된 도사를 '위의사'(威儀師), 도행이 넓고 깊은 도사들을 '선생'(先生)·'진인'(眞人)이라 부른다. 경전을 익힌 정도에 따라 도사 사이에도 다른 등급과 호칭을 두고 있다. 송대(宋代) 이후로 도사에는 출가도사(出家道士)와 재가도사(在家道士)의 구분이 생겼는데, 도관(道觀:도교사원)에 거주하며 결혼하지 않은 채 종교생활에 전념하는 전진파(全眞派)의 도사를 출가도사, 결혼할 수 있는 정일파(正一派)의 도사를 재가도사라 한다. 고구려 에서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청하자 당나라에서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천존상(天尊像)과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講)하게 한 것이 우리나라 도교 전래의 첫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다투어 신봉하니 당고조(唐高祖)가 624년(영류왕 7)에 고구려에 도사와 함께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어 도사로 하여금 〈도덕경〉을 강론케 했고 영류왕은 그 강론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해 당태종이 숙달(叔達) 등 도사 8명을 보내니, 왕이 기뻐하며 불사(佛寺)를 도관(道館)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의 위에 앉게 했다. 보장왕 때에 비로소 도사를 시켜 도교의 의식에 따라 국가 진호(鎭護)를 위한 재초(齋醮)를 거행했다. 고려시대에는 송휘종(宋徽宗)이 1110년(예종 5) 도사 2명을 보내주어 도사를 양성했고, 예종은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에 그렇게 해서 양성된 고려의 도사를 두어 도교의식을 집행하게 했다. 그런데 이들 고려의 도사들은 감색(紺色)의 장속(裝束)을 하는 중국의 도사와는 달리 복색도 이렇다 할 특색이 없었으며, 계율을 지키지 않고 낮에는 재궁에 있다가 밤에는 사실(私室)로 돌아가서 속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서 간관(諫官)들의 지탄을 받은 일도 있었다. 조선에 들어와 기복을 위한 의식 중심의 과의적(科儀的) 도교는 유자들의 반대로 급기야 폐지되고 도사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식인들 사이에 신봉되던 단학(丹學)으로도 불리는 수련적 도교는 맥을 형성하면서 유행했다. 음의 면의 도교란 이와는 달리 농민적이고, 민중적이며 민중 사이에서 생겨났던 여러 가지 도교신앙과 그 종교적 집단을 말한다. 이것은 도사들의 도교에 대해 민중도교라고 말할 수 있다. 민중 도교의 교조 여동빈(呂洞賓). 팔선(八仙)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행(奇行)과 속세를 초월한 것으로 알려진 8명의 신선이다. 도교의 사제들을 ‘도사’라 했는데, 이들은 그저 국가가 주는 ‘녹’을 받으면서 저희들끼리 도를 닦는 정도였다. 사대부들이 무시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나자 도사들도 피란갔는데 도사가 사라지자 정부는 부득이 도교 의례를 폐지했다. 그래도 아쉬울 건 없었다. 천년 넘게 지속된 도교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고, 그 자취는 ‘삼청동’이라는 지명과 ‘도포’라는 옷 이름에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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