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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도의 읍성은 모두 46곳이며 평지에 위치한 읍성은 언양읍성을 비롯해 16곳인데 이 평지읍성 대부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이다. 언양 읍성은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성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돌로는 1500년(연산군 6년)에 처음 쌓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7년(광해군 9년)에 새로 쌓았다고 합니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었는데,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성의 둘레는 약 1,500미터, 높이는 6.3미터 였으며 성벽의 4면에는 각각 문을 만들었고, 문 위에는 영화루 등 누각을 두었습니다. 성벽 모서리에는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를 세웠고, 성문 주위에는 성물을 보호하기 위한 웅성을 쌓았으며, 성문과 각루 사이에는 치성(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을 두었습니다. 성 안에는 각종 관아가 있었는데,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현,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습니다.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와 동문과 서문을 가로지르는 수로가 있었으며 4개의 우물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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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도의 읍성은 모두 46곳이며 평지에 위치한 읍성은 언양읍성을 비롯해 16곳인데 이 평지읍성 대부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이다. 언양 읍성은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게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성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돌로는 1500년(연산군 6년)에 처음 쌓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7년(광해군 9년)에 새로 쌓았다고 합니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반영되었는데, 큰 돌을 대충 갈아 쌓은 후 빈 공간에 잔돌을 채워 성벽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성의 둘레는 약 1,500미터, 높이는 6.3미터 였으며 성벽의 4면에는 각각 문을 만들었고, 문 위에는 영화루 등 누각을 두었습니다. 성벽 모서리에는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를 세웠고, 성문 주위에는 성물을 보호하기 위한 웅성을 쌓았으며, 성문과 각루 사이에는 치성(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을 두었습니다. 성 안에는 각종 관아가 있었는데,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현,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습니다.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와 동문과 서문을 가로지르는 수로가 있었으며 4개의 우물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제도에 구영등성은 조선 전기 일반 평지 읍성의 축조 수법과 동일하게 협축하였는데 외벽은 자연 대석으로 겉쌓기하고 내벽은 막돌로 지면에 중첩(重疊)하게 쌓은 뒤 적석(積石)은 크고 작은 돌을 차곡차곡 겉쌓기하였다. 현재 성지는 해안에 위치한 구영마을 남쪽의 야산 기슭에 평면 원추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성 내외에는 경작지와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현존하는 성의 몸체는 대부분 훼손되고 겨우 기단부만 남아 있다. 남원 읍성은 남원시에 있는 평지 읍성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에 처음 쌓았으며,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 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는데,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조선초기에 고쳐서 쌓아진 읍성(邑城)은 평지(平地)에 정방형(正方形)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동북에서 서남향하여 흐르는 북천(北天)과 주천(朱川)의 사이에 자리잡은 가장 전형적(典型的)인 중국식(中國式) 읍성(邑城)으로는 해자(垓子)가 있고, 동(東)·서(西)·남(南)·북(北)에 성문(城門)이 있었다. 서산 해미 읍성은 조선 태종 때인 1417년~1421년까지 3년여에 걸쳐 평지에 건축된 성으로 국내 읍성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성으로 손꼽힌다. 해미 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평지 읍성으로는 그 꼴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분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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