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408-450)이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 부황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 황제는 겨우 7세에 제위에 올랐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도 무능한 점에서는 서방황제인 동생 호노리우스와 큰 차이가 없어서, 그의 치적을 개략적으로나마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가 엄청나게 많은 그런 시기인데도,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정당한 이 맏 아드님의 업적이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임종시 나이 어린 자기 아들의 신상문제를 걱정한 바, 궁정 안에 신뢰할 수 있는 신하가 없고(황후 에우독시아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서방황제는 약체인데다가 벌써 타인과 마찬가지였으므로 고민하며 망설이던 끝에, 굳이 이웃나라인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Yazdegerd/Jazdegerd I)에게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대담하게 부탁하는 수단을 썼다. 상대방도 이런 영예로운 신뢰에 보답하여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일찍이 적국이던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려 하지 않았다. 궁정 안에서 이처럼 나이 어린 황제를 성실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선정을 베푼 것은 405년에 집정관 겸 민정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안테미우스(Anthemius. 훗날인 467년에 서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동명인의 조부되는 사람)이고, 이 시대에 로마제국을 지탱한 또 사람은 황제의 누님인 풀케리아(Pulcheria)였다. 불과 2살의 연장자였지만, 16세로 여제(Augusta)의 칭호를 받았고, 동생인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긴 미성년기와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뒤에는 그녀 자신의 이름과 또 명목상의 남편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이름으로, 결국 40년 가까이 되는 오랜 기간동안, 그녀는 동방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생애를 처녀의 몸으로, 경건한 신앙생활로 보냈으며, 오랜 세월의 시정은 그녀의 강력성을 찬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해도, 그녀의 온건성과 번영을 가져오게 한 치적은 상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생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굳이 무능력의 정도에 차등을 두는 것이 허용된다면 부황과 숙부황제의 약체성보다 더 밑돌았다고 할 수 있다."고 혹평되는데 반하여, 누나인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자손들 중, 대제의 웅대한 기상이나 능력을 얼마간이나마 이어받은 것은 그녀뿐인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이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던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는 그가 죽을 때(420년)까지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신뢰에 충실시 부응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바흐람 5세(Varanes/Vahram V)는 422년이 되자 동로마 제국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때는 격전도 별로 없이 완만한 형태에서 오랬동안 계속되던 중, 428년에 이르러 양국의 중간에 껴있는 아르메니아를 양국이 분할소유함으로써 결말이 났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분쟁에 거의 무관심했던 것 같지만, 쇠퇴일로를 걷던 동방제국에 대해 이 분쟁은 얼마 간의 광휘를 던져 준 사건이었다. 1.
* 넘겨주기비잔티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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