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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휴이사금(伐休泥師今) 또는 발휘왕(發暉王), 벌츄왕은 신라의 제9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7번째 왕이다.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 부인(只珍內禮)이다.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박씨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갔다. 부계(父系)는 탈해왕의 아들인 구추 각간(仇鄒角干)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이사금이다. 이매가 아달라왕 재위시에 죽은 것은 벌휴왕이 즉위한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벌휴의 즉위는 순전히 내례부인의 힘에 의한 것이였다. 벌휴 이사금은 기후를 점칠줄 알아 신라를 농본국으로 다져 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하니 이는 신라 사회에 2세기 말까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시사한다. 190 백제 원산항 침입, 구도 진압하다가 와산에서 패하였고, 구도 치곡성주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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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휴이사금(伐休泥師今) 또는 발휘왕(發暉王), 벌츄왕은 신라의 제9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7번째 왕이다. 탈해 이사금의 손자이며 각간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 부인(只珍內禮)이다.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이 없어 박씨 왕조가 일시적으로 끊기고 석씨에게 왕위가 다시 돌아갔다. 부계(父系)는 탈해왕의 아들인 구추 각간(仇鄒角干)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이사금이다. 이매가 아달라왕 재위시에 죽은 것은 벌휴왕이 즉위한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벌휴의 즉위는 순전히 내례부인의 힘에 의한 것이였다. 벌휴 이사금은 기후를 점칠줄 알아 신라를 농본국으로 다져 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하니 이는 신라 사회에 2세기 말까지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남아있었음을 시사한다. 185년 음력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해 소문국(召文國)을 치게 하였다. 187년 음력 2월 백제가 공격,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가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 막게 하였다. 이듬해인 188년 음력 7월 구도가 백제군과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189년 음력 8월 백제가 다시 공격해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패배, 이사금은 벌휴의 벼슬을 깎고 설지를 그 자리에 앉혔다. 190 백제 원산항 침입, 구도 진압하다가 와산에서 패하였고, 구도 치곡성주로 좌천되었다. 192년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를 피해 대규모로 신라에 도망왔다. 벌휴 10년(193) 여름 6월, 왜인이 큰 기근으로 1000여명이 몰려와 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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