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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원 읍성은 홍원의 읍성이다. 홍원읍에는 용원산성터를 비롯해 많은 산성터가 남아 있다. 함관령에는 이성계가 원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세운 달단동 승전기념비가 있다. 홍원의 문루로는 1798년(정조 22)에 건립한 의두루(依斗樓)와 홍원 읍성 남문의 문루인 곤화루(鯤化樓), 1691년(숙종 17)에 지어진 쇄취당(鎖翠堂), 1801년에 창건되었다가 1922년에 중수된 해월정(海月亭), 그리고 월파정(月波亭)·남산루(南山樓)·소선정(紹仙亭) 등이 남아 있으며, 사찰로는 향파암(香坡庵)·은적사(隱寂寺)·보문암(普聞庵)·흥복암(興福庵)·정수암(淨水庵)·망해암(望海庵)·은선암(隱仙庵)·석문암(石門庵)·영천암(靈泉庵)·화장암(華藏庵)·광흥암(廣興庵)·흥덕암(興德庵) 등이 있다. 옛 창고로는 읍성 안의 관아 남쪽에 있는 읍창(邑倉)을 비롯하여 운학면 학산리의 부창(富倉), 용원면의 요창(要倉)·산창(山倉), 경운면 우간진(右看津)에 있는 해창(海倉), 경운면의 평창(平倉)과 이 밖에 방어창(方魚倉)·군기고·화약고·진상고(進上庫)·대동고(大同庫)·전세고(田稅庫)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지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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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홍원 읍성은 홍원의 읍성이다. 홍원읍에는 용원산성터를 비롯해 많은 산성터가 남아 있다. 함관령에는 이성계가 원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세운 달단동 승전기념비가 있다. 홍원의 문루로는 1798년(정조 22)에 건립한 의두루(依斗樓)와 홍원 읍성 남문의 문루인 곤화루(鯤化樓), 1691년(숙종 17)에 지어진 쇄취당(鎖翠堂), 1801년에 창건되었다가 1922년에 중수된 해월정(海月亭), 그리고 월파정(月波亭)·남산루(南山樓)·소선정(紹仙亭) 등이 남아 있으며, 사찰로는 향파암(香坡庵)·은적사(隱寂寺)·보문암(普聞庵)·흥복암(興福庵)·정수암(淨水庵)·망해암(望海庵)·은선암(隱仙庵)·석문암(石門庵)·영천암(靈泉庵)·화장암(華藏庵)·광흥암(廣興庵)·흥덕암(興德庵) 등이 있다. 옛 창고로는 읍성 안의 관아 남쪽에 있는 읍창(邑倉)을 비롯하여 운학면 학산리의 부창(富倉), 용원면의 요창(要倉)·산창(山倉), 경운면 우간진(右看津)에 있는 해창(海倉), 경운면의 평창(平倉)과 이 밖에 방어창(方魚倉)·군기고·화약고·진상고(進上庫)·대동고(大同庫)·전세고(田稅庫)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유지만이 남아 있다. 홍원의 산성지로는 홍원읍의 천계봉 산성(天鷄峯山城)과 운학면의 성령 산성(城嶺山城), 용원면의 요원 산성(要原山城)이 있으며, 홍원 읍성은 주위가 462m로 동문과 남문의 문루가 남아 있다. 홍원은 고려 건국 직후부터 추진된 북진정책으로 영흥 이남은 고려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함주 이북은 여진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으므로 이 지방에도 역시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뒤 금나라가 쇠망하면서 고려의 영토로 회복되었으나, 몽고와의 전쟁중이던 1258년(고종 45)에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고에 항복하자 몽고는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실시하면서 쌍성총관부를 공략하여 영토를 회복하고 함주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가 곧 만호부로 고치고 1369년에 다시 목(牧)으로 승격시켰는데, 이 무렵에 비로소 함주에서 분리되어 현(縣)이 된 듯하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에 이 군의 명칭으로 기록된 홍헌(洪獻)·홍긍(洪肯) 등의 이름이 ≪용비어천가≫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분류:읍성 분류:홍원의 산성 분류:홍산성 분류:원산성 분류:쌍성 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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