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국(吳越國) 오대십국시대 중국의 나라였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 4천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기실 오월국과의 국교를 중시하여 일찍부터 교섭을 가진 것은 다름아닌 후백제였다. 강회지역 백제인은 광둥성으로 남하했고 당나라 멸망 후 그 잔류 유민들은 오월국을 세우고 그 일파인 견훤이 나주만으로 진출하여 오월국의 분국을 세웠다. 고려 태조(太祖:918∼943)재위 시에 오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 추장과 부족인들이 귀순·투항하였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넣었다. 이 비의 내용에 따르면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955년(광종 6)에 오월국으로 유학한 뒤 그 곳에서 불교를 강의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왕사 등으로 불렀다.
오월국(吳越國) 오대십국시대 중국의 나라였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 4천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기실 오월국과의 국교를 중시하여 일찍부터 교섭을 가진 것은 다름아닌 후백제였다. 강회지역 백제인은 광둥성으로 남하했고 당나라 멸망 후 그 잔류 유민들은 오월국을 세우고 그 일파인 견훤이 나주만으로 진출하여 오월국의 분국을 세웠다. 고려 태조(太祖:918∼943)재위 시에 오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 추장과 부족인들이 귀순·투항하였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넣었다. 이 비의 내용에 따르면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955년(광종 6)에 오월국으로 유학한 뒤 그 곳에서 불교를 강의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왕사 등으로 불렀다. 오월국이 북송에 의해 978년에 멸망하면서 월의 주요 장인들이 고려로 옴으로서 우리 도기 장인들이 청자 제작 기술을 배웠다. 9세기 혹은 10세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청자는 그후 거듭 발전을 하였다. 테두리를 씌운 상품의 청자로 950년대에 중국 오대 오월국에서 제작된 월주요산 청자발로 추정되는 것으로 그 당시 고려와 오월국과의 밀접한 교류 속에서 고려에 수입되어 광종에 의해 특별히 하사된 그릇이다. 장유(儒)는 상질현(尙質縣, 흥성(興城)의 옛이름) 사람으로 신라말에 난(亂)을 피하여 오월국(吳越國,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으며 고려가 개국한 뒤에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