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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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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년 5월 7일(러시아) ~ 1893년 11월 6일 ]는 19세기말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 〈백조의 호수 Swan Lake〉·〈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잠자는 숲속의 미녀 Sleeping Beauty〉 등의 작품으로 고전 발레 음악에 있어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로는 콜레라가 도시를 휩쓸고 있을 때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학설로는 그가 황실의 남자들과의 동성애로 비난받게 되자 추문을 피해 음독 자살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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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년 5월 7일(러시아) ~ 1893년 11월 6일 ]는 19세기말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 〈백조의 호수 Swan Lake〉·〈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잠자는 숲속의 미녀 Sleeping Beauty〉 등의 작품으로 고전 발레 음악에 있어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생애와 교육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그곳 정부 소유 광산의 감독이었다. 어머니가 프랑스계 러시아인이었고 또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관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적으로 조숙했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의 부모가 신경이 예민한 아이의 건강에 음악 공부가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정교사를 무척 좋아했으나 아버지가 근무지를 바꿔 모스크바로, 그리고 나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1848년 그 가정교사는 그만두게 되었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의 예비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시골뜨기 취급을 받아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14세 때 지극히 내성적인 그가 정열을 다해 사랑했던 어머니가 콜레라로 죽자 그는 매우 심한 타격을 입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상대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아노를 위한 짧은 왈츠곡을 작곡했으며 오페라를 작곡하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의 비정상적인 사랑과 아버지의 무능은 그의 잠재적인 동성애적 경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고, 남자 법률학교의 규율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잠재적 욕구를 행동으로 나타냈다는 증거는 없다. 법률학교에 있는 동안 산발적으로 받은 성악·피아노·화성법 레슨이 그의 음악교육의 전부였으며 잦은 오페라 극장 출입이 부족한 음악 교육을 보완해주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음악적 취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862년 새로 설립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법무부 서기직은 점점 음악에 몰두하는 그를 막을 만큼 흥미 있는 일이 못되었다. 넋을 잃은 채 공문서를 찢어 차근차근 씹어먹다가 그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곧 공무원의 직책을 사임하고 음악 학도가 되었다. 1864년 작곡한 첫번째 관현악 작품인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연극 〈폭풍 The Storm〉에 붙인 서곡은 후에 그의 음악에 수용되는 많은 양식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멘델스존 추종자였던 그의 스승 안톤 루빈스타인을 깜짝 놀라게 한 초기의 천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65년말 루빈스타인 형제로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법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활동 그의 교향곡 1번 G단조(겨울날의 환상) 작품 13(1866)을 작곡하면서 계속되는 과로로 정신적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866년 1월 모스크바에 편안하게 정착했다. 1860년대말과 1870년대초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음악과의 분명한 동질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둘 모두 민요와 러시아 민족음악 양식의 아버지인 미하일 글린카로부터 비롯된 화성을 다루고 있다. 그는 민족주의 음악(러시아 5인조 )의 지도자인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를 했으며 발라키레프의 제안으로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869)을 작곡했다. 차이코프스키를 알았던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본질적인 매력은 민족주의적 희가극 〈대장장이 바쿨라 Vakula the Smith〉(1874, 초연 1876)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 오페라를 개작한 〈귀여운 구두 Cherevichki〉에서는 러시아 5인조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인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가 니콜라이 고골리의 우크라이나 민화를 각색한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 Sorochintsy Fair〉과 유사한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는 무소르크스키가 작곡한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발라키레프의 민속음악적 어법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다. 러시아를 방문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인 데지레 아르토와의 이루지 못한 한 순간의 연애사건 이후에 그는 단 한 사람의 여자와 낭만적인 관계를 가졌다. 1870년대 중반 그는 또다시 신경쇠약에 걸렸다. 그의 생애에 있어 이러한 암흑기를 알리는 징후의 하나는 교향곡 4번 F단조 작품 36(1877)과 푸슈킨의 시를 각색한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Eugene Onegin〉(1877~78)에서 정점을 이룬 거의 광적인 작곡 활동이었다. 그는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탸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그를 사랑하게 되어 자신의 사랑을 거절하면 자살하겠다고 하자 그는 그녀가 잔인하게 쫓겨난 타탸나로 생각되어 그녀와의 결혼을 승락했다. 그는 불완전한 결혼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더욱 불행한 것은 색광이었던 그의 아내가 그로 하여금 자살을 기도하게끔 몰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자신은 성적인 면에서 부랑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자신의 아이는 가지지 못했다. 남은 생애 동안 좌절과 고독 속에서 살아야만 했으며 폭음과 창작만으로 위안을 삼았다. 우크라이나의 카멘카에 있는 그의 누이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여름마저도 그녀의 아들인 어린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에 대한 지나친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6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지지하는 부유한 미망인 나데츠다 폰 메크와의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충분한 연금을 지불하여 교수직에서 벗어나 작곡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의 뜻에 의해 두 사람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다. 그들의 친밀한 서신에는 차이코프스키보다는 그녀가 더 노출되었다. 호감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그는 언제나 그가 진정으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바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특별히 그녀를 위해 완성한 4번 교향곡의 상세한 프로그램은 매우 용의주도하다. 나중에 그는 넘치는 감정을 토로하는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는 것에 대해 귀찮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 이상한 관계는 분명 양쪽 모두가 깊이 느끼고 있던 정신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으며 특히 별거 후에도 아내가 성가시게 굴어 돈을 지불해야 했던 차이코프스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폰 메크와의 플라톤적 관계는 그의 취향에 더욱 더 적합한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연금을 합리화시키려는 시도로 그는 다음 몇 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작품을 썼다. 그 가운데는 피아노 소타나 G장조 작품 37(1878), 관현악 모음곡 1번 D단조 작품 43(1878~79), 그의 후원자인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을 위한 음악,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 The Maid of Orleans〉(1878~79) 같은 한층 무미건조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오페라를 상업적으로 작곡한 이유는 그가 보기에 먼저 작곡한 〈예브게니 오네긴〉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극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78~81년의 기간 동안 많은 중요한 업적들이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에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35(1878)와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작품 48(1880), 〈이탈리아 기상곡〉 작품 45(1880), 〈1812년 서곡〉 작품 49(1880) 등의 걸작이 작곡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초연 당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정도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던 〈예브게니 오네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황제의 찬사로 말미암아 큰 인기를 누렸다. 1885년에 작곡된 〈만프레드 교향곡 Manfred Symphony〉 작품 58은 아낌 없는 격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몇몇 절망적인 역사 사건 속에서 말년의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음악이 따라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 1885년에 모스크바 근교의 마이다노보에 자신의 집을 샀으며, 죽기 바로 전 해에 지금은 차이코프스키 박물관이 된 클린 근교의 집으로 옮기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러시아에서 보다 많은 여행을 시작했는데 코카서스에서는 특별히 즐거운 2번의 휴가를 보냈으며 트빌리시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새로 개작한 〈대장장이 바쿨라〉를 성공적으로 연주하여 지휘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했다. 1888년에는 라이프치히(이곳에서 그는 요하네스 브람스와 에드바르트 그리그를 만났음)와 함부르크·베를린·프라하·파리·런던에서 그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 위한 연주 여행을 했으며 그의 음악은 어느 곳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이 여행은 차이코프스키의 말년에 있어 절정이었다. 이후로는 전에 작곡한 많은 작품들의 지속적인 성공, 그리고 푸슈킨을 각색한 2번째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1890 공연)과 그가 좋아한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 공연,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음) 등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채에도 불구하고 다시 신경쇠약 증세가 심해졌다. 교향곡 5번 E단조 작품 64(1888)를 필두로 한 그의 주요작품들은 점점 감정적으로 격해져 히스테리와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더 많은 지역을 여행했는데 1889년에는 영국에서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 작품 23(1874~75)을, 1893년에는 교향곡 4번을 지휘했다. 1893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과 〈호두까기 인형〉을 서둘러서 연주회용 음악으로 개작한 모음곡 등에서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병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1890년에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둘의 관계와 연금을 끊어버리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연금이 끊어지기는 했어도 그다지 큰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는데 이것은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벌어들이는 인세가 손실을 충당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무렵 그가 국가연금의 수혜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코 그녀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그가 입은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가는 마지막 병상에서 정신착란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이름을 격분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893년 8월 차이코프스키는 마지막 교향곡이자 스스로 걸작으로 생각했던 교향곡 6번 B단조 작품 74를 완성해서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을 지휘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에 실망했다. 이 교향곡에서 새롭게 시도한 느린 빠르기의 마지막 악장으로는 불과 1년 6개월 전 보다 가벼운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의 초연에서 받았던 갈채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그릇된 기대를 가졌으며 그 자신과 그 작품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프로그램에 적은 이 작품에 대한 '신비한' 해설과 더불어 그는 이 작품 안에 그의 모든 영혼을 쏟아넣었으나 청중들은 그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로는 콜레라가 도시를 휩쓸고 있을 때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학설로는 그가 황실의 남자들과의 동성애로 비난받게 되자 추문을 피해 음독 자살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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