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姑臧)은 오호십육국 후량과 남량의 수도였다. 후량( ? 396-403 )의 도성은 오늘날의 감숙성 무위 (武威)에 해당하는 고장(姑臧) 이었다 . 여광은 전진(前秦) 의 부견(?堅) 휘하에서 수차례 무공을 세워 공신 반열에 올랐다. 후진 정권의 농서공 요석덕(姚碩德)은 6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장(姑臧)으로 밀고 들어왔다. 오랜 농성 끝에 결국 항복한 여륭은 양주자사에 책봉되어 간신히 영지를 보전한다. 397년 6월에 후량 내부의 건강군(建康郡)에서 단업이 저거몽손 (沮渠蒙遜)에게 옹립되어 북량(北凉)이 건국되었고, 다음으로 이어진 반란은 아주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양 정권의 수도 고장(姑臧)에서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 그 해 8월에는 후량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구(郭口)가 반란을 일으켜 후량은 내란상태에 빠졌다. 독발오고는 북량-서진(西秦)-곽구와 동맹을 맺어 후량을 포위하였다. 398년 6월, 곽구·양궤(楊軌)가 후량의 반격에 의해 고장에서 패퇴하였다.
고장(姑臧)은 오호십육국 후량과 남량의 수도였다. 후량( ? 396-403 )의 도성은 오늘날의 감숙성 무위 (武威)에 해당하는 고장(姑臧) 이었다 . 여광은 전진(前秦) 의 부견(?堅) 휘하에서 수차례 무공을 세워 공신 반열에 올랐다. 후진 정권의 농서공 요석덕(姚碩德)은 6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장(姑臧)으로 밀고 들어왔다. 오랜 농성 끝에 결국 항복한 여륭은 양주자사에 책봉되어 간신히 영지를 보전한다. 397년 6월에 후량 내부의 건강군(建康郡)에서 단업이 저거몽손 (沮渠蒙遜)에게 옹립되어 북량(北凉)이 건국되었고, 다음으로 이어진 반란은 아주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양 정권의 수도 고장(姑臧)에서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 그 해 8월에는 후량의 수도 고장(姑臧)에서 곽구(郭口)가 반란을 일으켜 후량은 내란상태에 빠졌다. 독발오고는 북량-서진(西秦)-곽구와 동맹을 맺어 후량을 포위하였다. 398년 6월, 곽구·양궤(楊軌)가 후량의 반격에 의해 고장에서 패퇴하였다. 후진 (오호십육국) 양주(凉州) 고장(姑臧)을 양도하여 하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406년 11월, 남량의 군주 독발녹단은 양주의 중심지 고장(姑臧)으로 수도를 옮긴다. 397년에 건국한 이래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고 있는 남량이었다. 그러나, 형제 상속을 거듭해 가면서 능력자(?) 독발녹단에게 왕위가 전하도록 하였다. 407년에는 산동의 남연(南燕)과 사천의 후촉(後蜀)이 유유의 압력을 받자 후진에 종속하여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또한 후진에게 복속했던 후구지가 동진에게 신속하였으며 오르도스에서 혁련발발이 대하를 건국하였다. 분류:양나라 분류:남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