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타(阿難陀, Ananda) 또는 다문제일(多聞第一)은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기억하는 제자이다. 가비라성 출신으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며 여러 왕자와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의 시자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25년 동안 언제나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대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불렸다. 어느 날 그가 사밧티 거리에 탁발을 하다가 기원정사로 돌아오던 중 어떤 계급보다 천시되던 마등가(摩登伽)라는 종족이 살고 있던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우물가에서 프라크리티라는 아가씨에게 마실 물 한 그릇을 청했는데 아가씨는 자신이 천민임을 들어 물을 줄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으나 그는 부처님의 제자는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프라크리티는 그의 수려한 용모와 자비로움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에 부처님이 중재하여 프라크리티는 비구니가 되었다. 이튿날 경장(經藏) 송출의 책임자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전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 ......”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 ‘나’는 아난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난타(阿難陀, Ananda) 또는 다문제일(多聞第一)은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기억하는 제자이다. 가비라성 출신으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며 여러 왕자와 함께 출가하여 부처님의 시자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25년 동안 언제나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대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불렸다. 어느 날 그가 사밧티 거리에 탁발을 하다가 기원정사로 돌아오던 중 어떤 계급보다 천시되던 마등가(摩登伽)라는 종족이 살고 있던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우물가에서 프라크리티라는 아가씨에게 마실 물 한 그릇을 청했는데 아가씨는 자신이 천민임을 들어 물을 줄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으나 그는 부처님의 제자는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프라크리티는 그의 수려한 용모와 자비로움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에 부처님이 중재하여 프라크리티는 비구니가 되었다.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실 때 임종을 지켜보며 슬퍼하던 그를 보고 부처님은 정성을 다해 자신을 시봉했던 유능한 수행자라고 주위의 대중들에게 칭찬했다. 그러나 너무 부처님의 수행에 의존한 나머지 부처님의 입적 때까지 아라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5백 명의 제자들이 라자가하 교외의 비파라산(毘婆羅山)에 있는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최초로 경전을 결집할 때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지도자 마하카사파(대가섭) 등이 아직 깨닫지 못한 그를 경전 정리의 책임자로 지명하는데 반대했다. 그는 책임감을 통감하고 결집이 열리기 전날 밤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이튿날 경장(經藏) 송출의 책임자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전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 ......”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 ‘나’는 아난을 지칭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모 교담미(曇彌 : 마하파자파티)의 출가를 도와 부처님께 청하여 최초의 비구니를 만들게 하였으며 가섭의 뒤를 이어 선종 제2조가 되었다. 120세까지 살다가 입적할 때는 마가다국의 아쟈타삿투왕과 베살리의 리차비족 사람들이 서로 사리를 차지하려 싸울 것을 예견하고 이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는 갠지스강 가운데에서 몸을 불태워 입적(入寂)하자 두 나라 사람들은 그의 이런 태도에 감복하여 사리를 서로 나누어 갖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분류:불교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