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9세 [Ptolemaeos IX Soter II,별칭은 Lathyros ?~ 기원전 80]는 기원전 2~1세기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왕비 클레오파트라가 여신(女神) 이시스에게 바친 것이라는 새김글씨가 들어가 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숙부 겸 외삼촌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10세를 낳았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아들로 태어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및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짝을 이루어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스렸다. 기원전 88년 단독으로 통치를 하게 된 뒤부터는 동방과의 무역을 발전시키며 로마의 과도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흑해에 면해 있던 폰투스 왕국과의 전쟁에 지원을 해달라는 로마의 요구를 거부했다. 기원전 88년 로마가 아테네를 약탈한 뒤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이 도시의 복구를 도왔고, 이런 이유로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기원전 80년에 죽었고 딸이 그 뒤를 이었다. 1.
* 넘겨주기
프톨레마이오스 9세 [Ptolemaeos IX Soter II,별칭은 Lathyros ?~ 기원전 80]는 기원전 2~1세기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왕비 클레오파트라가 여신(女神) 이시스에게 바친 것이라는 새김글씨가 들어가 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숙부 겸 외삼촌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결혼하여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10세를 낳았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아들로 태어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및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짝을 이루어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스렸다. 기원전 88년 단독으로 통치를 하게 된 뒤부터는 동방과의 무역을 발전시키며 로마의 과도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는 이해할 수 없는 조처를 취함에 따라 그의 왕비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이 모후는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를 더 좋아했으나 국민들의 감정에 못 이겨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제휴해 왕위를 유지했다. 그녀는 기원전 115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그의 여동생이며 왕비로서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도록 강요하고, 대신 좀더 온순한 성격 그의 막내 여동생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재혼하도록 했다. 이듬해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나간 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어머니와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자식 간에 잠재해 있던 적대감은 기원전 110년 10월 어머니가 그를 이집트에서 쫓아내고 둘째 아들을 키프로스에서 불러들이면서 마침내 폭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기원전 109년초 이집트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3월 어머니는 또다시 그를 쫓아냈다. 기원전 108년 5월 어머니와 화해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3번째로 이집트에서 도망쳐 키프로스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기원전 107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요구하는 한 계승권자를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로 침입해 들어왔다. 한편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이에 맞서 유대인의 왕과 동맹을 맺고 전력을 다해 또다른 셀레우코스 왕위 요구자를 지원했다. 오래 계속된 전쟁 끝에 어머니가 죽자(기원전 101)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키프로스에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이집트인들로부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2번째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항해 도중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혼자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왕비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딸로서 죽은 동생의 왕비였던 베레니케 3세를 불러들여 그녀와 함께 왕위를 유지했다. 그가 기원전 88년 이집트로 돌아오기 직전에 상(上)이집트의 테베에서 원주민의 반란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었으나, 3년에 걸쳐 전투를 벌인 끝에 테베는 항복했고 그 보복으로 약탈을 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흑해에 면해 있던 폰투스 왕국과의 전쟁에 지원을 해달라는 로마의 요구를 거부했다. 기원전 88년 로마가 아테네를 약탈한 뒤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이 도시의 복구를 도왔고, 이런 이유로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기원전 80년에 죽었고 딸이 그 뒤를 이었다. 기원전 76년, 이집트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들로 알려져있으나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왕위에 앉혔다. 덴데라(Dendera)신전의 부지는 고대부터 사용되어왔지만, 그 신전 자체는 서기 1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y)9세 통치하에 시작된 신전 공사는 로마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1.
* 넘겨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