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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구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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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구 읍성(古阜舊 邑城)의 고려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 주소는 고부구읍성 주소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번지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성황산 정상에 쌓여진 이 성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옛 고부의 읍성이다. 그러나 성 안에서 발견되는 각종 그릇조각과 기와조각으로 미루어보아 삼국시대 백제가 이미 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미 둘레 460보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다 하며 문종원년(1451)에 더욱 넓혀 쌓아 둘레가 1803척이었다 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큰 규모의 읍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성터는 동·서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으로 둘레는 1050m이다. 성벽은 돌로 쌓았다하나 성이 무너진 다음에 돌을 빼냈기 때문에 지금은 토성처럼 보이는데 거의 허물어져 원형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북쪽에 쌓았던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성벽의 아랫부분은 흙으로 묻혀 마치 흙더미가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서·남·북쪽에는 문터가 남아 있는데, 북쪽에는 물이 흘러나가도록 설치한 수구문 터도 볼 수 있다. 성 안에는 동서에 봉우리가 있고 중앙은 남쪽을 향한 평지로 되어 있는데, 이곳이 관아터이며 그 북서쪽에는 객사터가 있다. 그리고 남문터와 북동쪽, 북문터에 우물터가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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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구 읍성(古阜舊 邑城)의 고려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 주소는 고부구읍성 주소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번지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성황산 정상에 쌓여진 이 성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옛 고부의 읍성이다. 그러나 성 안에서 발견되는 각종 그릇조각과 기와조각으로 미루어보아 삼국시대 백제가 이미 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미 둘레 460보의 돌로 쌓은 읍성이 있었다 하며 문종원년(1451)에 더욱 넓혀 쌓아 둘레가 1803척이었다 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큰 규모의 읍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성터는 동·서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으로 둘레는 1050m이다. 성벽은 돌로 쌓았다하나 성이 무너진 다음에 돌을 빼냈기 때문에 지금은 토성처럼 보이는데 거의 허물어져 원형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북쪽에 쌓았던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성벽의 아랫부분은 흙으로 묻혀 마치 흙더미가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서·남·북쪽에는 문터가 남아 있는데, 북쪽에는 물이 흘러나가도록 설치한 수구문 터도 볼 수 있다. 성 안에는 동서에 봉우리가 있고 중앙은 남쪽을 향한 평지로 되어 있는데, 이곳이 관아터이며 그 북서쪽에는 객사터가 있다. 그리고 남문터와 북동쪽, 북문터에 우물터가 하나씩 있다. 서남 방향으로 뻗은 성황산을 타원형으로 감은 둘레 1,050m의 성으로 현재 성문터·수구문·우물터·건물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의 축성연대는 고려 현종조로 보이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석축 둘레 2,369척(약 700m), 높이 13척(약 4m)이며, 우물 셋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장 긴 쪽은 직선거리가 400m이며 전변 중앙의 남문터에서 북변 수구문터까지의 너비는 180m이다. 성 안에는 동·서에 각각 높이 132m, 120m의 봉우리가 있고 중앙은 남쪽을 면한 평지로 되어 있다. 이곳이 관아터로서, 남문터에서 안으로 42m 들어간 곳에 석곽으로 짠 우물이 있다. 성의 북서편에는 객관이 있었고, 동쪽 봉우리의 북쪽 기슭에는 성황사, 서쪽 봉우리 남쪽 기슭에는 사직단이 있었다. 북문지는 동봉 북단에 있는데, 성 밖에는 원형의 여장터가 남아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65년(영조 41) 관아를 성남 평지로 옮김으로써 폐성되었으며, 현재 일부의 석축 부분을 제외하고는 토성처럼 보이는 것은 폐성 후에 석재를 빼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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