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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5군영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어 그 중심을 차지하였다.
- 훈련도감(訓鍊都監) 선조 갑오년에 처음으로 도제조(都提調) 의정(議政)이 겸한다. 를 두고 제조 5명 그 가운데 두 명은 호조 판서가 으레 겸하였다. 그 후 인조가 2명을 감하고, 효종이 1명을 감하였다. 을 두었는데 후에 2명이 되었다. 대장(大將)ㆍ중군별장(中軍別將)ㆍ천총국별장(千摠局別將)ㆍ파총(把摠)ㆍ초관(哨官)이 있으며, 낭청(郞廳)이 6명인데, 1명은 문관, 2명은 음관(蔭官), 1명은 병조의 무비랑(武備郞), 1명은 본국의 파총, 1명은 호조의 별영랑(別營郞)이 으레 겸하였다. 영종 을해년 31년 에 고쳐서 종군관(從軍官)으로 하였다. 별무사(別武士) 68명 국출신(局出身) 1백 50명, 병제조에 상세하다. 마병(馬兵) 6초(哨), 보군(步軍) 26초, 난후별초(攔後別哨) 1초(哨), 표하군(標下軍) 1천 1백 20명, 승호(陞戶) 1백 95명 가 있다. ○ 일찍이 계사년에 명(明) 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중국 군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기회를 타서 강절(江浙) 군사의 기예를 배워 익히면, 몇 해 동안에 모두 정예(精銳)하게 되어 왜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성룡이 행재소(行在所)로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아뢰고 이어 금군(禁軍) 한사립(韓士立)으로 하여금 70명을 모집하게 하여 낙상지에게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낙상지가 자기 휘하에 있는 장육삼(張六三) 등 10명을 내어 교사(敎師)로 삼아 주야로 창과 칼, 낭선(筤筅) 등의 기예를 익히게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따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대신 윤두수(尹斗壽)로 이 일을 맡게 하였는데, 9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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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련도감(訓鍊都監) 선조 갑오년에 처음으로 도제조(都提調) 의정(議政)이 겸한다. 를 두고 제조 5명 그 가운데 두 명은 호조 판서가 으레 겸하였다. 그 후 인조가 2명을 감하고, 효종이 1명을 감하였다. 을 두었는데 후에 2명이 되었다. 대장(大將)ㆍ중군별장(中軍別將)ㆍ천총국별장(千摠局別將)ㆍ파총(把摠)ㆍ초관(哨官)이 있으며, 낭청(郞廳)이 6명인데, 1명은 문관, 2명은 음관(蔭官), 1명은 병조의 무비랑(武備郞), 1명은 본국의 파총, 1명은 호조의 별영랑(別營郞)이 으레 겸하였다. 영종 을해년 31년 에 고쳐서 종군관(從軍官)으로 하였다. 별무사(別武士) 68명 국출신(局出身) 1백 50명, 병제조에 상세하다. 마병(馬兵) 6초(哨), 보군(步軍) 26초, 난후별초(攔後別哨) 1초(哨), 표하군(標下軍) 1천 1백 20명, 승호(陞戶) 1백 95명 가 있다. ○ 일찍이 계사년에 명(明) 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중국 군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기회를 타서 강절(江浙) 군사의 기예를 배워 익히면, 몇 해 동안에 모두 정예(精銳)하게 되어 왜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성룡이 행재소(行在所)로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아뢰고 이어 금군(禁軍) 한사립(韓士立)으로 하여금 70명을 모집하게 하여 낙상지에게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낙상지가 자기 휘하에 있는 장육삼(張六三) 등 10명을 내어 교사(敎師)로 삼아 주야로 창과 칼, 낭선(筤筅) 등의 기예를 익히게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따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대신 윤두수(尹斗壽)로 이 일을 맡게 하였는데, 9월에 임금의 행차가 돌아오다가 연안(延安)에 이르러, 다시 유성룡이 그 일을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갑오년 2월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처음에 평양을 회복하였을 때 임금이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을 찾아 사례하고, 중국 군사의 전후(前後)의 승패가 다름을 물었다. 여송이 말하기를, “앞서 왔던 북쪽의 장수들은 항상 북방 오랑캐를 막는 전법을 익혔으므로, 전쟁에 불리하였지만 지금 쓴 전법은 곧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있는 왜를 막는 법이었으므로 전승(全勝)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척씨의 책을 보고자 청하니 여송이 깊이 두고 내어놓지 않았다. 임금이 몰래 역관을 시켜 이여송의 휘하로부터 구해 얻었다. 임금이 해주(海州)에 있을 때 이것을 유성룡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내가 세상의 책을 본 것이 많으나 이 책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우니, 경이 나를 위해 강의ㆍ해석하여 법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성룡이 종사관 이시발(李時發) 등과 더불어 토론하고, 또한 유생(儒生) 한교(韓嶠)를 낭관(郞官)으로 임명하여 중국 장수의 아문에 질문하는 것을 전담하게 하였다.임금이 환도하게 되자 명하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고, 무신(武臣) 조경(趙儆)을 대장으로,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문신(文臣) 신경진(辛慶晋)ㆍ이홍주(李弘冑)를 낭속(郞屬)으로 삼아, 굶주린 백성을 모집하여 군사를 삼으니, 응모하는 자가 자못 많이 모였다. 유성룡이 당미(唐米) 1천 석을 청해 얻어, 하루 한 사람에게 두 되씩을 주어 모집하였고, 조경이 법을 정하여 한정하되 능히 큰 돌 하나를 들 수 있고, 능히 한 길 되는 담을 뛰어넘는 자라야 합격하게 하였다. 열흘 사이에 수천 명을 얻어 척씨(戚氏)의 삼수(三手) 포(砲)ㆍ사(射)ㆍ작(斫) 의 기예를 연마하는 법을 가르치며, 파총과 초관을 두고 부대를 나누어 연습하게 하니 수개 월 만에 군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임금이 친히 진법(陣法)을 익히는 데 임어하니, 이후로부터 도감군이 늘 숙위와 호종을 하여 국가가 힘입게 되었다 유성룡이 갑오년에 차자를 올렸다. 병제 조에 상세하다. 유성룡이 이내 청하기를, “군량을 조치하여, 서울에 1만 명의 군사를 더 모집하여 다섯 영(營)을 두고, 한 영에 2천 명을 두되 해마다 절반은 성중에 머물러 연습케 하고, 절반은 성밖에 나가 넓고 빈 땅을 가려서 둔전(屯田)을 짓게 하되 윤번으로 교체하여, 그것으로 군량의 근원을 후하게 하고 더욱 근본을 굳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모두 좇았으나 일은 마침내 실행되지 못했다. ○ 이때, 5부의 장정 수천을 뽑아서 절강의 병기(兵技)를 익히게 하고 초관(哨官)과 파총(把摠)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다. 또 각 도에 명하여 국(局)을 설치하게 하고, 포환(砲丸)을 쏘는 자를 포수, 창과 칼을 쓰는 자를 살수(殺手), 활을 쏘는 자는 사수(射手)라 일컫고 통칭하여 조련군(操鍊軍)이라 하니, 드디어 경포수(京砲手)ㆍ삼수량(三手糧)의 근본이 이루어져 당시의 사람들이 견디어 내지 못했다 한다. 《계갑록(癸甲錄)》 《일월록(日月錄》 ○ 또 외방에 초관 혹은 속오군(束伍軍)을 두었는데, 양민이나 공사(公私)의 천인(賤人)을 막론하고 장정을 가려 인원을 충당하고, 교사(敎士)를 각 도(道)에 나눠 보내어, 삼수법(三手法)을 교련하였다. 또 그해에 유격법(遊擊法)을 교련하였는데, 호대수(胡大受)가 나왔으니 삼수군을 가르치기 위하여 청해 온 것이었다. 《국조보감》 ○ 또 포수의 승호법(陞戶法)을 설치하고, 식년(式年)마다 서울 및 지방에 있는 기운 센 장정을 뽑아 올려, 원래 군사 중 노쇠한 자와 사고로 면제되는 자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언제나 2백 30명을 뽑았다. 현종 병오년에 서울에서 뽑아 올리는 것을 파하였으며, 숙종 갑오년에 또 송도(松都)에서 뽑아 올리는 것도 파하였는데, 다른 도는 전과 같이 뽑아 올렸다. ○ 훈련도감에서 둔전(屯田)을 파한 뒤로부터 여러 서적을 인쇄하여 그것을 팔아서 군량의 저축 기금으로 삼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글자로 활자를 만들어 먼저 《창려집(昌黎集)》을 인쇄하고, 또 인감주(印弇州)가 엮은 《사찬(史纂)》을 인쇄하였다. 《백사집》 ○ 도감은 갑오년부터 창설하였는데, 지금은 사무와 권한이 점점 중하여져서 하나의 큰 아문이 되었고, 병조는 다만 군부(軍簿)와 받드는 문서(文書)만을 관장할 뿐이다. 《지봉유설》 ○ 효종 2년 신묘에, 훈련도감의 기병과 포병의 인원수를 전보다 더하고, 어영(御營) 군사도 부대를 나누어 윤번으로 번을 세우게 하니 각각 조리가 있고, 삼남(三南)에서 군사에 편입한 자도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 효종 병신년에 군문(軍門)에 겸파총(兼把摠)을 설치하고, 그 군문에서 수령(守令)을 스스로 천거하게 하였다.
- 훈련도감(訓鍊都監)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5군영 중에서 가장 먼저 창설되어 그 중심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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