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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디카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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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디카스 2세는 마케도니아의 왕(454 ~413 BC)이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앙자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페르디카스 2세같은 인물도 없을 것이다. 배신의 달인, 배신의 자가발전, 배신의 무아지경 등등 마케도니아 왕의 배신을 상징하는 단어는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알렉산드로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알케타스 2세(BC 454~448)이다. 알케타스 2세는 상당한 주정뱅이로, 당시 마케도니아는 아직 부족제 군주국가(Tribal Monachy)로 왕권이 강하지 못한 일종의 부족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국가였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그의 노력은 거의 수포로 돌아간 상태였다. 조카인 아르켈라오스가 보다 못해 그를 살해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페르디카스 2세(BC 448~413)를 왕위에 올렸다. 히포크라테스는 마케도니아의왕이었던 페르디카스 2세(Perdiccas Ⅱ)와 인연을 맺게 된다.
  • 페르디카스 2세는 마케도니아의 왕(454 ~413 BC)이였다. 그는 알렉산더 1세의 앙자였다. 기원전 452년 알렉산더의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떨어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마케도니아 종족은 거의 완전히 자치적이였고 왕과는 매우 약하게 동맹하였다. 기원전 434년까지는 페르디카스의 형제 필립은 왕좌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와 엘리메아의 왕 데르다스의 지지를 얻었다. 페르디카스는 포티다에아를 포함한 아테네에 조공하는 도시들의 반란을 배후 조정하여 맞섰다. 아테네는 군사력으로 대응하였고 마케도니아로 30척의 배로 1000인의 장갑 보병을 마케도니아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테르미를 붙잡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피드나를 포위하였고 그곳에서 40척의 배에 2000명의 보병의 지원군을 만났다. 그러나 아테네가 피드나를 포위하면서 그들은 코린트가 포티다에아를 지원하기 위해 1600명의 장갑보병과 200명의 경보병을 보냈다는 소식을 접수하였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는 트라키아의 왕 시탈케스왕과 동맹하였다. 기원전 429년 페르디카스는 다시 아테네를 배반하고 1000명의 군대를 스파르타를 아카르나니아에서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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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디카스 2세는 마케도니아의 왕(454 ~413 BC)이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앙자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페르디카스 2세같은 인물도 없을 것이다. 배신의 달인, 배신의 자가발전, 배신의 무아지경 등등 마케도니아 왕의 배신을 상징하는 단어는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알렉산드로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알케타스 2세(BC 454~448)이다. 알케타스 2세는 상당한 주정뱅이로, 당시 마케도니아는 아직 부족제 군주국가(Tribal Monachy)로 왕권이 강하지 못한 일종의 부족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국가였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그의 노력은 거의 수포로 돌아간 상태였다. 조카인 아르켈라오스가 보다 못해 그를 살해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페르디카스 2세(BC 448~413)를 왕위에 올렸다. 그러는 동안 아민타스 1세와 알렉산드로스가 힘들여 이룩해놓은 중앙 집권 정부는 힘을 잃고 어느새인가 지방 토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페르디카스의 동생이었던 필리포스의 반란에 호응하여 아테네인들과 트라키아인들이 지원군을 보내 피드나 마을을 공격하게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테네는 해군을 보내 마케도니아의 항구 도시인 테르메를 점령했다. 그러자 페르디카스는 포테이다이아를 위시하여 마케도니아 해안에 위치한 델로스 동맹 소속의 도시 국가들을 움직여 아테네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때마침 낭보가 찾아들었다. 코린토스가 자국의 식민지였던 포테이다이아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온다는 소식이었다. 아테네와 페르디카스는 새로 동맹을 맺었으나 페르디카스는 이 동맹을 바로 깨고 포테이다이아를 공격했다. 기원전 452년 알렉산더의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떨어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마케도니아 종족은 거의 완전히 자치적이였고 왕과는 매우 약하게 동맹하였다. 기원전 434년까지는 페르디카스의 형제 필립은 왕좌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와 엘리메아의 왕 데르다스의 지지를 얻었다. 페르디카스는 포티다에아를 포함한 아테네에 조공하는 도시들의 반란을 배후 조정하여 맞섰다. 아테네는 군사력으로 대응하였고 마케도니아로 30척의 배로 1000인의 장갑 보병을 마케도니아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테르미를 붙잡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피드나를 포위하였고 그곳에서 40척의 배에 2000명의 보병의 지원군을 만났다. 그러나 아테네가 피드나를 포위하면서 그들은 코린트가 포티다에아를 지원하기 위해 1600명의 장갑보병과 200명의 경보병을 보냈다는 소식을 접수하였다. 새로운 위협과 싸우기 위해 아테네는 페르디카스 왕 동맹하여 포티다에아로 나아갔다. 페르디카스는 즉각 조약을 깨고 포티다에아로 진군하였다. 아테네인들은 결국 승리하였지만 시보타의 전투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결국 아테네의 헤게모니를 파괴하였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는 트라키아의 왕 시탈케스왕과 동맹하였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인은 트라키아인과 동맹을 맺고, 그간 점령하고 있던 테르메를 반환하고 필리포스에 대한 지원을 끊는 조건으로 마케도니아에 동맹을 요청해왔다. 페르디카스는 이 동맹을 수락했지만, 역시 이 동맹을 유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페르디카스는 동맹을 다시 끊고 스파르타인의 아카르나니아 침공을 지원했다. 그 댓가로 트라키아 인의 왕인 시탈케스의 침공을 받아야만 했다. 페르디카스는 트라키아인의 침공으로 인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그와 혼인 동맹을 체결하여 위기를 타파할 수 있었다. 페르디카스는 반란자였던 필리포스의 아들로 시탈케스의 사위가 된 아민타스 2세(기원전 429)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29년 페르디카스는 다시 아테네를 배반하고 1000명의 군대를 스파르타를 아카르나니아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아민타스 2세는 페르디카스의 왕권을 존중하여 더 이상 스스로 왕을 칭하지는 않고, 곧 왕좌를 포기하였다. 기원전 424년부터 페르디카스는 완전히 스파르타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를 지원하여 아테네의 식민지였던 암피폴리스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스파르타 인은 마케도니아의 국경을 지키는 데 군대를 파견해주었으나, 무장도 좋지 않고 훈련도 되지 않은 마케도니아군은 스파르타군을 내버려둔 채 도망가고 말았다. 스파르타군은 분노에 찬 나머지 마케도니아의 보급 부대를 공격했고, 기원전 423년 페르디카스는 어쩔 수 없이 동맹을 아테네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17년까지 페르디카스는 아테나를 버리고 스파르타-아르고스 동맹에 합류하였다. 기원전 417년 다시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으나, 단지 4년 후에 아테네의 압력에 굴복하여 페르디카스는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깨고 아테네와 연합하여 암피폴리스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413년 죽을 때에는 아테네의 동맹으로 죽었다. 기원전 413년 그는 죽고 그의 왕자 아르켈라우스가 왕이 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마케도니아의왕이었던 페르디카스 2세(Perdiccas Ⅱ)와 인연을 맺게 된다.
  • 페르디카스 2세는 마케도니아의 왕(454 ~413 BC)이였다. 그는 알렉산더 1세의 앙자였다. 기원전 452년 알렉산더의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떨어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마케도니아 종족은 거의 완전히 자치적이였고 왕과는 매우 약하게 동맹하였다. 기원전 434년까지는 페르디카스의 형제 필립은 왕좌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아테네와 엘리메아의 왕 데르다스의 지지를 얻었다. 페르디카스는 포티다에아를 포함한 아테네에 조공하는 도시들의 반란을 배후 조정하여 맞섰다. 아테네는 군사력으로 대응하였고 마케도니아로 30척의 배로 1000인의 장갑 보병을 마케도니아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테르미를 붙잡았다. 그들은 계속하여 피드나를 포위하였고 그곳에서 40척의 배에 2000명의 보병의 지원군을 만났다. 그러나 아테네가 피드나를 포위하면서 그들은 코린트가 포티다에아를 지원하기 위해 1600명의 장갑보병과 200명의 경보병을 보냈다는 소식을 접수하였다. 새로운 위협과 싸우기 위해 아테네는 페르디카스 왕 동맹하여 포티다에아로 나아갔다. 페르디카스는 즉각 조약을 깨고 포티다에아로 진군하였다. 아테네인들은 결국 승리하였지만 시보타의 전투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결국 아테네의 헤게모니를 파괴하였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는 트라키아의 왕 시탈케스왕과 동맹하였다. 기원전 429년 페르디카스는 다시 아테네를 배반하고 1000명의 군대를 스파르타를 아카르나니아에서 지원하였다. 기원전 424년 그는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를 도와 아테네로부터 중요한 식민지 암피폴리스를 접수하였다. 기원전 417년까지 페르디카스는 아테나를 버리고 스파르타-아르고스 동맹에 합류하였다. 단지 4년 후에 아테네의 압력에 굴복하여 페르디카스는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깨고 아테네와 연합하여 암피폴리스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413년 그는 죽고 그의 왕자 아르켈라우스가 왕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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