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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리왕 (琉璃王,?~18)은 고구려 제2대 왕(BC 19~AD 18 재위)이였다. 이름은 유리(類利) 또는 유류(儒留), 누리(累利), 주류(朱留) 등이다. 중국의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처음 이름이 여해(閭諧), 나중 이름이 여달(閭達)이라고 되어 있다. 동명왕의 맏아들인 유리왕은 부여의 예씨부인 아들이다. 주몽에게는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여 태어난 맏아들인 유리가 자신을 찾아오자,여러 왕비들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예씨 부인( BC42년2월25일 ~ 18년6월24일)과 유리는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와 고구려의 태자로 책립되었다. 비류국은 주몽에게 항복하여 다물도가 되었고 송양왕은 다물후가 되었다. 그는 딸을 유리왕에게 출가시켰으나 1년 남짓 되자 죽었다. BC 17년(유리왕 3)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어 2명의 여자를 계실(繼室)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는 화희(禾姬)로 골천(川) 사람이고 한 여자는 치희(稚姬)로 한인(漢人)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질투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지어 각각 살게 했다. 그는 황조가를 짓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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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리왕 (琉璃王,?~18)은 고구려 제2대 왕(BC 19~AD 18 재위)이였다. 이름은 유리(類利) 또는 유류(儒留), 누리(累利), 주류(朱留) 등이다. 중국의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처음 이름이 여해(閭諧), 나중 이름이 여달(閭達)이라고 되어 있다. 동명왕의 맏아들인 유리왕은 부여의 예씨부인 아들이다. 주몽에게는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여 태어난 맏아들인 유리가 자신을 찾아오자,여러 왕비들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예씨 부인( BC42년2월25일 ~ 18년6월24일)과 유리는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와 고구려의 태자로 책립되었다. 비류국은 주몽에게 항복하여 다물도가 되었고 송양왕은 다물후가 되었다. 그는 딸을 유리왕에게 출가시켰으나 1년 남짓 되자 죽었다. BC 17년(유리왕 3)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어 2명의 여자를 계실(繼室)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는 화희(禾姬)로 골천(川) 사람이고 한 여자는 치희(稚姬)로 한인(漢人)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질투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지어 각각 살게 했다. 그는 황조가를 짓게된다.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태조대왕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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