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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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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5세 [Ptolemaeos V Epiphanes, BC 210경~ 180]는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 왕이다. 로제타석에는 기원전196년, 당시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사제들에게 내린 지시 사항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원전 196년에 제작된 이 돌은 열두 살난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위해 만든 것이다. 왕위에 있는 기원전 205년부터 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의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집트에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침공해 들어가는 큰 모험을 감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역공격을 위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기원전 201년 안티오코스 3세가 다시 쳐들어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무찌르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점령했다. 로마의 외교적 개입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BC 194(또는 193)년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혼인했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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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5세 [Ptolemaeos V Epiphanes, BC 210경~ 180]는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 왕이다. 로제타석에는 기원전196년, 당시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사제들에게 내린 지시 사항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원전 196년에 제작된 이 돌은 열두 살난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위해 만든 것이다. 왕위에 있는 기원전 205년부터 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의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밑에서 일하던 부패한 신하 소시비우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뒤 5세밖에 안 된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소시비우스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BC 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시비우스 일파가 어린 왕의 즉위와 그 부모의 죽음을 선포한 뒤 뛰어난 관리들을 모두 이집트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국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시아와 에게 해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소시비우스가 BC 202년 은퇴하자 그의 일파의 일원인 아가토클레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가토클레스의 등장에 불만을 품은 펠루시움(이집트의 동쪽 변경도시)의 총독 틀레폴레모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해 들어왔고, 그의 지지자들은 군중들을 선동해 아가토클레스를 물러나게 하고 다른 궁정 관리를 그 자리에 앉혔다.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운동장에서 그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들을 처벌할 것을 외치며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군중 앞에서 한 궁정 신하의 암시에 따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중들은 아가토클레스와 그의 가족들을 색출해내 이들을 학살했다. 권좌를 차지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랐던 틀레폴레모스도 얼마 안 가 제거되었다. 이집트에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침공해 들어가는 큰 모험을 감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역공격을 위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기원전 201년 안티오코스 3세가 다시 쳐들어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무찌르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점령했다. 로마의 외교적 개입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BC 194(또는 193)년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혼인했다. 이집트에서는 선왕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일어났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BC 197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일 삼각주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며 항복해온 반란군에 대해서도 이들을 극도로 잔인하게 다루었다. 상(上)이집트에서는 BC 187(또는 186)년까지 계속해서 분란이 있었고, 그는 성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후견인과 고문들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더이상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테베 총독의 권한을 상이집트 전역까지 포괄하도록 확대했다. BC 196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칙령을 내려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넣었고, '로제타석'으로 알려진 이 비석은 1799년에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또는 그림문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집트 원주민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 칙령에는 부채와 과세를 면제해주고,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또한 항복한 반란자들을 용서하고, 사원에 대한 기부금을 늘렸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꾸준히 그리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통치 말기에 그는 수완 좋은 환관 하나를 그리스인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했는데,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BC 180년 5월경 갑자기 죽었다. 그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겼고 왕비가 이들의 섭정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 사이의 아들로 어머니와 공동 섭정으로서 함께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왕후로서 기원전 180년에서 176년까지 재위했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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