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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피 읍성은 함열, 용안 등과 함께 금강 남안 방어의 중심적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임피읍성은 조선 초기 세종 12년(1430)에 만들어졌다. 당시 병조판서 최윤덕이 삼도도순문사로 임명 받아 군현의 성(城)들을 살피던 중 전라감사 신개, 절도사 이점 등과 함께 임피현을 순시하다 현의 지형을 살펴 터를 정하고 임피현령 장옥상, 만경현령 우형, 옥구현 판사 송귀희 등의 감독하에 이들 군현의 장정 16,900명을 동원하여 세종 12년 10월 보름에 시작하여 46일 만에 완성한 성이다. 임피읍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성은 석성이며 주위가 582보라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성으로 주위가 3,674척 (1,113m), 높이가 8척(2.4m)이라고 나와 있다. 임피읍성의 모습은 임피면 읍내리 북방산의 남쪽 기슭을 포함하여 임피읍내를 감싸안은 전형적인 평산성의 모습으로 북방산을 주산으로 삼아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나온 산줄기에 성을 쌓아 평지인 남쪽에서 서로 만나게 함으로써 같은 평산성인 옥구읍성과 그 규모와 성의 모습이 무척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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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임피 읍성은 함열, 용안 등과 함께 금강 남안 방어의 중심적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임피읍성은 조선 초기 세종 12년(1430)에 만들어졌다. 당시 병조판서 최윤덕이 삼도도순문사로 임명 받아 군현의 성(城)들을 살피던 중 전라감사 신개, 절도사 이점 등과 함께 임피현을 순시하다 현의 지형을 살펴 터를 정하고 임피현령 장옥상, 만경현령 우형, 옥구현 판사 송귀희 등의 감독하에 이들 군현의 장정 16,900명을 동원하여 세종 12년 10월 보름에 시작하여 46일 만에 완성한 성이다. 임피읍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성은 석성이며 주위가 582보라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석성으로 주위가 3,674척 (1,113m), 높이가 8척(2.4m)이라고 나와 있다. 임피읍성의 모습은 임피면 읍내리 북방산의 남쪽 기슭을 포함하여 임피읍내를 감싸안은 전형적인 평산성의 모습으로 북방산을 주산으로 삼아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나온 산줄기에 성을 쌓아 평지인 남쪽에서 서로 만나게 함으로써 같은 평산성인 옥구읍성과 그 규모와 성의 모습이 무척 유사하다. 현재 남은 유적은 주로 서쪽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서쪽 대나무숲 속에는 읍성이 석성임을 증명하는 석축들이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줄지어 쌓여 있다. 석축은 옥구읍성에 비하여 큰 편인데 기본이 50×50㎝이며 큰 것은 2m정도의 것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 놀랍게 한다. 임피읍성 또한 백제 때는 시산현, 마한 때는 신흔국이 있는 역사 깊은 고장인데 세종 12년에 축조되었다고 하지만 서쪽 대밭 밑으로 옥구읍성과 같이 다층식 토단방책지가 있어서 이미 백제 때 성곽이 있던 곳에 읍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대밭의 낙엽과 흙을 조금만 긁어내면 현재의 석축 아래 비슷한 크기의 돌들이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쪽 100m 가량은 석성의 흔적이 완연하지만 서쪽 소로길을 지나 북서쪽 산성은 성의 형태만 남아 있고 석축은 겨우 한두 개를 산밑 밭고랑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서쪽의 예를 보건대 그많은 석축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 북쪽 성벽은 성의 형태는 완벽하지만 이곳 역시 석축은 찾을 길이 없다. 흡사 토성의 모습을 보는 듯 싶어 석성과 토성이 혼재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북동쪽은 산을 깎아 대성중학교를 만드는 바람에 그 흔적이 없다. 동쪽 언덕은 민가와 공장, 축사 등이 자리잡아 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으나 동쪽 교동 나가는 통로로 언덕의 축사에 오르면 1m×1m 크기의 석축 3기를 확인할 수 있어 이곳 또한 석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의 남쪽 즉 중앙은 현재 군산-익산간 국도가 지나가는 곳인데 훈풍루라는 문루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그 흔적은 전혀 없다. 임피읍성의 축성방식은 전형적인 내탁법을 사용하였다. 내탁법은 바깥쪽만 석축을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밋밋하게 쌓아 올린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축성법이다. 내탁법은 성 안의 사람들이 성곽을 방어하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보여진다. 성의 서쪽 대나무숲에서는 읍성이 내탁법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데 성 안쪽 면에 20×40㎝ 가량의 석축으로 성의 안쪽을 쌓은 흔적이 있고 대나무숲 안에서는 줄지어 선 석축의 파여진 안쪽 면에서 흙과 잡석 무더기를 확인할 수 있다. 조사해 본 바 성의 높이는 기록대로 2m 정도, 폭은 대략 4m 정도로 보인다. 임피읍성은 읍성내에 객사, 연지, 향교, 노성당 등의 유적이 남아 있고 성벽 또한 전부는 아니지만 서쪽 대나무밭의 경우 복원하면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곳으로서 성읍마을로 관광지화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현재의 대책없는 방치로 인하여 주변 주민들에 따르면 서쪽 성벽의 석축들을 시내의 가정주택 정원석으로 쓰려고 채취해 가는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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