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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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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농(神農)은 중국 삼황의 하나로 흔히 '염제(炎帝) 신농'으로 불린다. 황제 헌원씨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인물이다.
  • 신농(神農)은 중국 삼황의 하나로 흔히 '염제(炎帝) 신농'으로 불린다. 황제 헌원씨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인물이다. 염제(炎帝)는 ‘불꽃(炎)’이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과 태양의 신이다. 염제(炎帝)는 신농(神農)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업의 신이다. 염제가 하늘에서 내려와 곧바로 땅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설과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수천 년전 소전(少典)이라는 임금의 왕비 여등(女登)은 별바라기를 하려고 하려고 화양(華陽;화려한 햇볕)으로 나들이를 갔는데, 그 곳에서 신비스럽게 생긴 용을 보고 온 몸이 감전된 듯한 기운을 느겼는데 열 달 후에 아기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염제 신농이다. 그의 모습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시대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신농씨과 후직씨(后稷氏)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농단을 세워 매년 임금이 직접 밭을 간 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 인류에게 그만큼 많은 혜택을 베풀어 준 신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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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농(神農)은 중국 삼황의 하나로 흔히 '염제(炎帝) 신농'으로 불린다. 황제 헌원씨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인물이다.
  • 신농(神農)은 중국 삼황의 하나로 흔히 '염제(炎帝) 신농'으로 불린다. 황제 헌원씨 이전에 한족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인물이다. 염제(炎帝)는 ‘불꽃(炎)’이라는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과 태양의 신이다. 염제(炎帝)는 신농(神農)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글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업의 신이다. 염제가 하늘에서 내려와 곧바로 땅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설과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수천 년전 소전(少典)이라는 임금의 왕비 여등(女登)은 별바라기를 하려고 하려고 화양(華陽;화려한 햇볕)으로 나들이를 갔는데, 그 곳에서 신비스럽게 생긴 용을 보고 온 몸이 감전된 듯한 기운을 느겼는데 열 달 후에 아기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염제 신농이다. 그의 모습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28세기에 인신우두(人身牛頭)의 형상을 하고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마차와 쟁기를 만들었으며 소를 길들이고 말에게 멍에를 씌웠다. 또한 백성들에게 불로써 토지를 깨끗하게 하는 법을 가르쳤다. 신농은 중국을 확고한 농경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작성한 365종의 약초에 관한 목록은 후대 식물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말을 시작했으며, 1주일이 되기 전에 걸어다녔고, 3세가 되자 들에 나가 쟁기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라 시대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신농씨과 후직씨(后稷氏)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농단을 세워 매년 임금이 직접 밭을 간 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 인류에게 그만큼 많은 혜택을 베풀어 준 신이 어디 있을까? 1. * 태양의 신: 그는 햇빛에 의해서 작물의 생장을 도왔다. 2. * 농업의 신: 나무로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가르쳤다. 염제가 식량부족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곡식의 비가 내려 이것을 주어다 심었다는 설과 몸빛이 붉은 새 한 마리가 주둥이에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물고 하늘을 날아다니더니 그 이삭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것을 주어다 심었다는 설이 있다. 그로 인해서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변하게 되었다. 3. * 상업의 신: 태양이 중천에 오르는 한낮을 눈금으로 해서 사람들을 시장에 모이게 하여 교역을 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4. * 의약의 신: 그는 산야를 헤메다가 신통력을 갖춘 붉은 채찍인으로 약초를 때리면서 각자의 풀이 지닌 독성의 유무라든가 각종 효능을 분별해서 인간의 병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나라 육우의 <다경>에 따르면, 신농이 직접 풀을 씹어서 맛을 보다가 독초에 중독되어 신음하다가 끊인 물에 우연히 날아든 나무잎을 함께 마시니 해독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녹차의 기원이다. 유럽인들이 맥주, 아시아인이 녹차를 즐겨 마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물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맥주는 괜찮다"는 유럽 속담이 있다. 고대 유럽인들은 물을 끊여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맥주를 맥주의 알코올 살균력 때문에 물 대신 마시면 수인성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알았다고 한다. 신농이 다스렸던 고대 중국인들은 위생관리를 위해 물을 철저히 끊여 마시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또 다른 설로는 그가 단장초(斷腸草)를 맛보다가 창자가 끊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한의학의 창시자인 셈이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은 茶陵(차릉;지금의 호남성 차릉현)에 묻혔다고 한다. 그는 황제(黃帝)가 부상하기 전에 신들의 세계를 지배하고 이렇듯 인류에게 많은 공적을 끼쳤던 위대한 신이었던 황제와의 싸움에서 진 후 주신(主神)의 자리를 빼앗기고 남방으로 쫓겨나 남방의 지역 신으로 격하되었다. 염제는 황제와 두 차례의 큰 전행을 벌였다. 한번을 본인이 직접 신들을 거느리고 판천(阪泉)이라는 곳에서 싸웠다. 또 한번은 그의 후계자인 치우(蚩尤)가 대신하여 탁록(涿鹿)이라는 곳에서 싸웠다. 두 차례 전쟁에서 패하여 미개지인 남방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황제보다 앞서 대륙을 지배했던 신이었기에 그의 후손 중에는 유명한 신들이 많다. 불의 신 축융(祝融)과 물의 신 공공(共工), 땅의 신 후토(后土)와 시간의 신 열명(噎鳴) 등이 모두 거의 자손이다. 또 그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운명은 서로 엄청나게 달랐는데 후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 딸은 다만 염제의 소녀(小女)라고만 불리었을 뿐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비를 관장하는 관리 노릇을 하다가 뒤에 지극한 수련을 닦고 선인이 된 적송자(赤松子)의 선술(仙術)에 반해서 자신도 그 뒤를 쫓아 여선인(女仙人)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딸은 여와(女娲)라 했다. 나이가 아직 젊었던 그녀는 어느 날 동해에 목욕하러 나갔다가 그만 큰 파도에 쓸려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너무도 억울했던 그녀의 영혼은 정위(精衛)라는 작은 새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발구산(發鳩山) 이라는 산에서 살았다. 정위는 자기 명을 앗아버린 동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가련하게도 끝까지 동해에 대한 보복에 큰 뜻을 품었다. 날마다 서쪽 산에서 조약돌이나 작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와서는 큰 파도가 밀려오는 동해의 물결 사이에 떨어뜨리며 동해를 메워 버리려고 결심하는 것 이었다. 이것이 정위전해(精衛塡海), 즉 정위가 바다를 메우려한다는 고사이다. 또 한 딸은 요희(瑤姬)라고 했는데, 여와(女娲)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정열적인 소녀였다. 나이가 차서 처녀티가 날 무렵, 아직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고요산(姑瑤山)이라는 산 중턱에 예쁘고 가련한 노란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이 한 그루의 요초(瑤草)야 말로 그녀의 화신이었다. 신기한 것은 이 열매를 먹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일종의 사랑의 묘약(妙藥)이었던 셈인데 아마 사랑도 해보기 전에 죽은 요희의 간절한 소망이 그 풀에 깃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 어린 나이에 죽어간 요희의 운명을 가엾이 여긴 천제가 이윽고 그녀를 사천성에 있는 무산(巫山)으로 보내어 구름과 비의 신으로 봉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아침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구름으로 화하여 산마루 위를 넘나들고 저녁 무렵에는 구슬픈 비가 되어 골짜기와 산기슭을 적셨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자신의 애달픈 정열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전국시대의 말엽에 초나라 회왕(懷王)과 또 그 뒤의 그의 아들 낭왕(囊王)이 운몽택이란 연못에서 놀다가 고당관(高唐觀)이라는 누대에서 잠시 쉬며 잠들었을 때, 그 꿈속에 환영처럼 나타난 무산의 여신 요희가 타는 듯한 정열을 바쳐 사랑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초나라의 궁정 시인 송옥(宋玉)에 의해서 세상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염제는 동방에서 남방으로 터전을 옮겼던 탓인지 동방과 남방의 민족들이 그를 시조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많다. 월남의 개국 신화에서 염제는 민족의 시조신으로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염제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손에 벼 이삭을 든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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