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는 바락의 아들로 차가타이 한국의 칸(재위:1282~1307년)이었다.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그러던 1301년, 카이두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그리고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즉위한 후에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는 원나라로 차바르를 추방시켰다. 1307년 오고타이 한국을 멸망시킨 두아 칸이 붕어한 이후에 즉위한 케벡 칸과 에센부카 칸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은 약 20여 년간 중앙아시아의 분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두아는 바락의 아들로 차가타이 한국의 칸(재위:1282~1307년)이었다.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그러던 1301년, 카이두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그리고 원을 비롯한 모든 한국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즉위한 후에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는 원나라로 차바르를 추방시켰다. 1307년 오고타이 한국을 멸망시킨 두아 칸이 붕어한 이후에 즉위한 케벡 칸과 에센부카 칸에 의해 차가타이 한국은 약 20여 년간 중앙아시아의 분쟁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