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 7월 유자광 등의 훈구파가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연산군 4년인 1498년, 실록청에서는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사초를 모아 편집했다. 이때 사림파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삽입한 것을 훈구파의 이극돈이 발견하고,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문제 삼았다. 조의제문은 겉으로는 초나라의 회왕(의제)가 꿈에 나타나 이를 조문한다는 내용이었으나, 항우에게 죽은 의제는 실제로는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했던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이때 꼬투리를 제공한 김종직은 1492년 이미 사망한 상태라 부관참시형을 받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 7월 유자광 등의 훈구파가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연산군 4년인 1498년, 실록청에서는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사초를 모아 편집했다. 이때 사림파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삽입한 것을 훈구파의 이극돈이 발견하고,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문제 삼았다. 조의제문은 겉으로는 초나라의 회왕(의제)가 꿈에 나타나 이를 조문한다는 내용이었으나, 항우에게 죽은 의제는 실제로는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했던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이때 꼬투리를 제공한 김종직은 1492년 이미 사망한 상태라 부관참시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