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르닥샤샤의 라틴 그리스식 발음이다. 그의 치세는 진리(아르타)를 통해서이다. 기원전 474년에 태어나 465년에서 424년까지의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역시 마크로케어(라틴어, 롱기마누스)라는 존칭을 지녔다. 왜냐하면 그는 오른손이 왼손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팔라부니의 조지안 가를 경유하여 러시아인 루리키드 가문의 돌고루키가 그의 후손임을 주장하였다. 페르시아가 유리메돈에서 패한 후에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군사 행동은 잠잠해졌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1세가 집권했을 때 그는 아테네인들을 그리스 내의 그들의 적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고립시키는 새로운 전술을 시행하였다. 이것이 간접적으로 아테네인들에게 델리안 동맹의 보물을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옮기게 하였다. 이 자금 지원의 실행은 기원전 450년,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전투를 발생시켰다. 그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은 키프로스를 공격하였다. 이 원정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던 키몬의 실패 후 칼리아스의 평화가 아테네, 아르고스 그리고 페르시아간에 기원전 449년 합의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르닥샤샤의 라틴 그리스식 발음이다. 그의 치세는 진리(아르타)를 통해서이다. 기원전 474년에 태어나 465년에서 424년까지의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역시 마크로케어(라틴어, 롱기마누스)라는 존칭을 지녔다. 왜냐하면 그는 오른손이 왼손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팔라부니의 조지안 가를 경유하여 러시아인 루리키드 가문의 돌고루키가 그의 후손임을 주장하였다. 페르시아가 유리메돈에서 패한 후에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군사 행동은 잠잠해졌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1세가 집권했을 때 그는 아테네인들을 그리스 내의 그들의 적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고립시키는 새로운 전술을 시행하였다. 이것이 간접적으로 아테네인들에게 델리안 동맹의 보물을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옮기게 하였다. 이 자금 지원의 실행은 기원전 450년,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전투를 발생시켰다. 그 전투에서 그리스인들은 키프로스를 공격하였다. 이 원정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던 키몬의 실패 후 칼리아스의 평화가 아테네, 아르고스 그리고 페르시아간에 기원전 449년 합의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1세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를 승리로 이끌었던 데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에서 도편추방당한 뒤에 도피처를 제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