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의 아버지인 헨리 4세는 일찌감치 캐서린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프랑스 왕실 또한 캐서린의 언니 발루아의 이자벨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압박 조치로서 캐서린과의 결혼 및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요구했다. 캐서린의 어머니 이자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며서 1420년 6월 2일 헨리 5세와 캐서린은 트루아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2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 해 말, 윈저성에서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났지만 남편인 헨리 5세가 1422년 8월 급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캐서린은 이후 오웬 튜더와의 사이에서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를 비롯한 3남 1녀의 자식을 얻었다. 캐서린은 1437년 딸 마거릿을 낳고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녀가 두 번째 남편 오웬 튜더와의 사이에서 낳은 에드먼드 튜더는 이후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의 아버지이다.
헨리 5세의 아버지인 헨리 4세는 일찌감치 캐서린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프랑스 왕실 또한 캐서린의 언니 발루아의 이자벨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압박 조치로서 캐서린과의 결혼 및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요구했다. 캐서린의 어머니 이자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며서 1420년 6월 2일 헨리 5세와 캐서린은 트루아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2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 해 말, 윈저성에서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났지만 남편인 헨리 5세가 1422년 8월 급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캐서린은 이후 오웬 튜더와의 사이에서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를 비롯한 3남 1녀의 자식을 얻었다. 캐서린은 1437년 딸 마거릿을 낳고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녀가 두 번째 남편 오웬 튜더와의 사이에서 낳은 에드먼드 튜더는 이후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