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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R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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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R 역설(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1935년 연구소의 새 연구원이 된 스물여섯 살의 유대인 물리학자 네이선 로젠(Nathan Rosen,1909~95)과 칼텍에서 만나 연구소로 옮겨온 마흔아홉 살의 또 다른 유대인 물리학자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i,1896~1966)의 도움을 받았다. 1935년 5월에 발표되어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EPR(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으로 알려진 4페이지짜리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온 후 발표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제목에서 “물리학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을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로젠은 엄청난 양을 계산했고, 포돌스키는 영어 논문을 작성했다.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가 명백한 개념 문제를 수학적 형식주의 속에 묻어버렸다고 불만스러워했다. 논문이 발표된 직후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에게 “논문이 내가 처음 원했던 것처럼 잘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핵심적인 것이 형식주의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라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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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PR 역설(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1935년 연구소의 새 연구원이 된 스물여섯 살의 유대인 물리학자 네이선 로젠(Nathan Rosen,1909~95)과 칼텍에서 만나 연구소로 옮겨온 마흔아홉 살의 또 다른 유대인 물리학자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i,1896~1966)의 도움을 받았다. 1935년 5월에 발표되어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EPR(Einstein, Podolsky, Rosen) 논문으로 알려진 4페이지짜리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온 후 발표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제목에서 “물리학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을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로젠은 엄청난 양을 계산했고, 포돌스키는 영어 논문을 작성했다.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가 명백한 개념 문제를 수학적 형식주의 속에 묻어버렸다고 불만스러워했다. 논문이 발표된 직후 아인슈타인은 슈뢰딩거에게 “논문이 내가 처음 원했던 것처럼 잘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핵심적인 것이 형식주의에 밀려나고 말았습니다”라고 불평했다. 『뉴욕 타임스』 신문 기사의 제목은 “아인슈타인이 양자이론을 공격하다/과학자와 두 동료는 옳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냈다”였다. 아인슈타인과 두 사람의 공동 저자는 사실주의적 전제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도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고 물리적 양의 값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런 물리량에 해당하는 물리적 실재의 요소가 존재한다. 즉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입자의 위치를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으며 입자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입자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입자의 위치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관찰과 완전히 독립되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볼프강 파울리는 화가 나서 하이젠베르크에게 긴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좋은 동반자라고 할 수 없는 포돌스키와 로젠과 함께 다시 한 번 양자역학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런 일은 늘 재앙입니다.” 닐스 보어의 어느 동료는 “이런 공격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것이다. 보어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다”고 보고했다. EPR 논문을 본 보어는 솔베이 회의에서 성공적으로 그랬듯이 자신이 다시 한 번 아인슈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양자 역학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어가 반론을 완성하는 데 6주일 이상 걸렸다. 그의 반론은 아인슈타인의 논문보다 길었다. 보어는 불확정성원리에서 관측에 의해 나타나는 기계적 교란이 불확정성의 원인이라는 주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기계적 교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양자 불확정성에 대한 보어의 설명에는 측정에 의한 교란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어는 자신의 상보성 개념을 이용해 상당 부분을 보완했다. 그는 두 입자들이 하나의 전체 현상의 일부임을 지적했다. 두 입자들이 상호작용 했기 때문에 서로 얽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양자적 함수를 가진 하나의 전체 현상이거나 혹은 하나의 전체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보어는 EPR 논문이 같은 순간에 한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모멘텀을 모두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제대로 부정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입자 A의 위치를 측정하면 멀리 떨어진 쌍둥이 B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이 옳다. 마찬가지로 A의 모멘텀을 측정하면 B의 모멘텀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입자 A의 위치를 측정한 후에 모멘텀을 측정한다고 해서 입자 B의 그런 특성에 현실성을 부연하더라도, 실제로 주어진 시각에 입자 A의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으므로 입자 B에 대해서도 두 가지 모두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 분류:양자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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