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평(西安平)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한대(漢代)부터 진대(晉代)까지 요동군의 속현으로 존재하면서 고구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삼국 사기에는 서안평을 고구려가 두번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146년(태조왕 94)과 242년(동천왕 16)의 공격이 그것이다. 서기 242년 동천왕 16년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 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자 영토를 넓히기에 힘써 서기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고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서안평은 서해로 가는 압록강 수로의 요충지였는데, 고구려가 요동군과 낙랑군을 잇는 이 이음쇠를 뽑아버린 것이다. 서기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였다. 한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서안평(西安平)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한대(漢代)부터 진대(晉代)까지 요동군의 속현으로 존재하면서 고구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삼국 사기에는 서안평을 고구려가 두번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146년(태조왕 94)과 242년(동천왕 16)의 공격이 그것이다. 서기 242년 동천왕 16년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 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미천왕이 왕위에 오르자 영토를 넓히기에 힘써 서기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고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서안평은 서해로 가는 압록강 수로의 요충지였는데, 고구려가 요동군과 낙랑군을 잇는 이 이음쇠를 뽑아버린 것이다. 서기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였다. 한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