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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돈[辛旽 ?~ 1371(공민왕 20)]은 고려 말기의 승려이다. 신돈이 과부들을 간음하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비단옷을 입고 공민왕을 기만하였다.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요공(耀空). 돈(旽)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俗名)이며, 법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 승명은 편조(遍照).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玉川寺)의 비(婢)였다. 당시 노비가 중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영산의 유력자였기 때문에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한 신분 때문에 늘상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산방(山房)에 거처했다. 1358년(공민왕 7) 왕의 측근인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이 중이다"라는 이승경(李承慶)의 비난을 받았으며, 정세운(鄭世雲)으로부터 죽음의 위협도 받았다. 이러한 충돌은 이미 이때 신돈이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특히 이들이 홍건적 침입 때 활약한 무장(武將)임을 고려한다면 신돈의 역할이 무장세력을 견제하는 입장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는 당시 무장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다음에 비로소 정치표면에 나설 수 있었다. 1364년 머리를 기르고 유랑 걸식하는 두타(頭陀)가 되어 다시 왕을 찾아오자, 왕은 '청한거사'라는 호를 주고 사부(師傅)로 삼아 국정을 자문하게 했다. 이무렵 공민왕은 1356년의 반원(反元) 개혁정치의 시도 이후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또다시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신돈을 등용했다. 왕은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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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돈[辛旽 ?~ 1371(공민왕 20)]은 고려 말기의 승려이다. 신돈이 과부들을 간음하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뒤에서는 비단옷을 입고 공민왕을 기만하였다.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요공(耀空). 돈(旽)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俗名)이며, 법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 승명은 편조(遍照).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玉川寺)의 비(婢)였다. 당시 노비가 중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영산의 유력자였기 때문에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한 신분 때문에 늘상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산방(山房)에 거처했다. 1358년(공민왕 7) 왕의 측근인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이 중이다"라는 이승경(李承慶)의 비난을 받았으며, 정세운(鄭世雲)으로부터 죽음의 위협도 받았다. 이러한 충돌은 이미 이때 신돈이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특히 이들이 홍건적 침입 때 활약한 무장(武將)임을 고려한다면 신돈의 역할이 무장세력을 견제하는 입장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는 당시 무장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다음에 비로소 정치표면에 나설 수 있었다. 1364년 머리를 기르고 유랑 걸식하는 두타(頭陀)가 되어 다시 왕을 찾아오자, 왕은 '청한거사'라는 호를 주고 사부(師傅)로 삼아 국정을 자문하게 했다. 이무렵 공민왕은 1356년의 반원(反元) 개혁정치의 시도 이후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또다시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신돈을 등용했다. 왕은 그가 "도(道)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또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큰 일을 맡길 만하다"면서 신뢰했다. 이에 대해 신돈도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음을 아뢰고, 비록 참언이나 훼방이 있더라도 자신을 끝까지 믿어줄 것을 청하여 왕으로부터 "사(師)는 나를 구하고 나도 사를 구하리라"는 다짐을 받았다. 공민왕은 신돈이야말로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해 많은 권력을 부여했다. 그는 1365년 5월에 최영 등 무장세력을 비롯하여 이인복(李仁復)·이구수(李龜壽) 등 많은 권문세족을 물러나게 했고, 인사권을 포함한 광범위한 안팎의 권력을 총괄했다. 이렇게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자 중국에서는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으며, 그가 출입할 때에는 왕과 같은 의례가 행해졌다. 그가 실시한 변혁으로는 첫째, 내재추제(內宰樞制)의 신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선발된 일부 재신(宰臣)과 추밀(樞密)이 궁중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였는데,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의 확대에 따른 왕권의 약화를 만회할 수 있는 기구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둘째, 1366년 5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했다(→ 색인 전민변정사업). 이 기구는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이 제도의 실시로 권문세가들이 탈점했던 토지와 인민을 그 주인에게 돌려준 경우가 많아 "성인이 나타났다"는 찬양을 받기도 했다. 셋째, 국학인 성균관의 중영(重營)이다. 그는 1367년 5월에 숭문관(崇文館) 옛 터에 성균관을 중영할 때 직접 그 터를 살피고, "문선왕(文宣王:孔子)은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스승"이라고 하면서 이 사업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 사업은 뒤이어 시행되는 5경4서재(五經四書齋)의 분리 및 과거3층법(科擧三層法)의 채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성리학의 전래·확산 및 신진사류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균관의 중영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색·정몽주·이존오·이숭인·정도전·권근·윤소종·임박 등 신진 문신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신돈에 대해 이들은 대체로 현실을 인정하고 참여하여 자기성장을 이루어나갔고, 신돈도 그들과의 적극적인 협조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돈의 정치·사회·경제 개혁의 단행은 당시 지배층의 많은 반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권문세족은 신돈의 개혁으로 그 기반을 위협받고 있었고 자신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 신진사류가 성장하자, 신돈이 〈도선비기 道詵秘記〉를 근거로 평양천도론까지 제기했을 때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적극 나서게 되었다. 1367년 10월에 신돈에 의해 밀려난 전(前) 시중 경천흥(慶千興)과 지도첨의 오인택(吳仁澤)을 비롯해 그를 소개했던 김원명 등 전직·현직 고위관료들이 밀의하다가 발각되었고, 1368년 10월에는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 등이 신돈을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했으며, 그후에도 신돈을 제거하려는 권문세족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369년경부터 국내외의 정세가 여러모로 그에게 불리해졌다. 즉 개혁정치의 부작용이 격화된 데다가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신돈의 존재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원(元)·명(明) 교체기에 즈음하여 만주에 있던 동녕부(東寧府)의 정벌 단행으로 무장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였던 신진사류와 승려인 신돈과의 융화에 한계가 뚜렷이 나타났으며, 집권 말기에 그가 처첩을 거느려 자식을 낳고 주색에 빠지자 비난이 높아졌다. 1369년에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스스로 5도(五道)의 도사심관(都事審官)이 되고자 사심관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1370년말부터 그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특히 태후와 사이가 나빴던 신돈은 마침내 태후 및 그와 연결된 권문세족의 공격을 받아 반역의 혐의로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1371년 7월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신돈의 지위는 전적으로 왕권의 비호 아래 얻어진 것이고 집권기간도 6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력한 권문세족을 제거하면서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이 기간에 추진된 개혁을 통해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신진사류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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