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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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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즉시 그를 독립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로 인정했다. 이 왕조는 기원전 30년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을 이집트의 통치하였다.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있다가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어(기원전 323~28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판도 안에서 세워진 어떤 왕조보다 오랫동안 지속했으며 기원전 3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인에게 굴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에오르다이아 지역 출신의 귀족인 라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조와 친척 관계에 있던 아르시노에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동(侍童)으로 있으면서 교육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알렉산드로스와 친해졌다. 기원전 337년 그는 황태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곧 왕의 근위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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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즉시 그를 독립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로 인정했다. 이 왕조는 기원전 30년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을 이집트의 통치하였다.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있다가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어(기원전 323~28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판도 안에서 세워진 어떤 왕조보다 오랫동안 지속했으며 기원전 3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인에게 굴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에오르다이아 지역 출신의 귀족인 라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조와 친척 관계에 있던 아르시노에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동(侍童)으로 있으면서 교육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알렉산드로스와 친해졌다. 기원전 337년 그는 황태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곧 왕의 근위대에 들어갔다. 기원전 336~335년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의 유럽 원정에 참여했던 그는 기원전 330년 가을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으로 임명되었고, 이 자리에 있을 때인 기원전 329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자객을 사로잡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고원지대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음)에서 인더스 강으로 진격하던 중에(기원전 327~325) 벌어진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히다스페스 강(지금의 인도 젤룸 강)을 지키는 마케도니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같은 그의 군사적 업적에 대해 여러 번 영예를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에서 페르시아인 아르타카마와의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인과 이란인들을 서로 섞으려 한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행사였다. 알렉산드로스 밑에서 신중하고 믿음직한 군대 사령관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뛰어난 외교술과 전략적 능력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 점은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오랜 기간에 걸친 분쟁에서 입증되었다. 장군들이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음을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바빌론에서 열린 회합을 통해 거대한 제국의 여러 속주(satrapy)들을 장군들끼리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서 인접한 리비아와 아라비아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고, 나일 강 유역이 갖는 지리적 고립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이곳을 헬레니즘 문화권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국내의 행정을 정비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하고 키레나이카(리비아의 최동부 지역)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시리아 및 소아시아의 해안선 지역도 획득했다. 그의 바람은 이를 통해 군사적 안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우호 정책을 취해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유지했으며, 이집트 원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기원전 322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키레나이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아프리카 식민 도시를 획득했다. 기원전 322~321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연합해 옛 제국의 아시아 지역 통치자 페르디카스와 싸웠다. 그결과 계승자들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페르디카스는 전쟁중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적 역량은 이 전쟁에서 시험을 받았다. 시리아 북부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의 여러 속주에 대한 분배가 다시 이루어져 유럽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인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레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티파트로스의 셋째 딸인 에우리디케와 혼인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기원전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의 손녀 베레니케 1세와 다시 결혼했다. 카산드로스는 그에 앞서 기원전 319년 아버지가 죽자 그가 사전에 지명해놓은 계승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그는 기원전 305년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15~311년 '제국의 계승자들'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키프로스를 얻었다. 이 전쟁중 그는 가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기원전 312)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집트인 부대가 이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원전 310년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기원전 306년 키프로스를 다시 잃었다. 키레네도 한동안 상실했으며 기원전 308년 손에 넣었던 코린트를 비롯해 인접한 시키온과 메가라에 있는 중요한 그리스 도시들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기원전 306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근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했고, 이 해전의 승자인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306년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대한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그를 추종하고 있던 나머지 총독들도 기원전 305~304년 제각기 왕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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