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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진족(女眞, 중국어 간체: 女真, 정체: 女眞, 병음: nǚzhēn) 여진족, 주르첸, 주르첸족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에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진은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여진족은 크게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나누었다.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민족으로,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수·당 때에는 말갈족으로 불리다가 송대에 이르러 여진으로 바뀌었다.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여진의 여가 고구려의 여이고, 진족의 진이 대진국의 진이다. 문종(文宗) 22년 6월(1068년 6월 2일 음력) 6월 2일에 동여진 귀덕장군 안구(安矩) 등이 내조하였다. 고려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게 되자 예종 2년(1107)에 윤관이 별무반 17만 대군을 이끌고 1108년 함흥 평야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에 함경도 지역에 쌓은 아홉 개의 성인 동북 9성을 설치하였다.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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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여진족(女眞, 중국어 간체: 女真, 정체: 女眞, 병음: nǚzhēn) 여진족, 주르첸, 주르첸족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에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부 만주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진은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여진족은 크게 숙여진과 생여진으로 나누었다.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민족으로,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수·당 때에는 말갈족으로 불리다가 송대에 이르러 여진으로 바뀌었다.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여진의 여가 고구려의 여이고, 진족의 진이 대진국의 진이다. 문종(文宗) 22년 6월(1068년 6월 2일 음력) 6월 2일에 동여진 귀덕장군 안구(安矩) 등이 내조하였다. 고려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게 되자 예종 2년(1107)에 윤관이 별무반 17만 대군을 이끌고 1108년 함흥 평야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에 함경도 지역에 쌓은 아홉 개의 성인 동북 9성을 설치하였다.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숭녕진 등이다. 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부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였고 여진족 추장 우꼬네(오고네)의 야망은 오직 요나라를 정벌하는데 있다. 왕성이 함락되고 왕이 자결함으로써 여진족이 대승한다. 그후 우꼬네는 옥화 공주를 왕후로 삼고자 했으나 북송의 멸망은 1127년이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일찍이 맹장으로도 이름난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여진족과의 싸움이 있었다. 이성계가 여진족 많은 지역에서 컸고 여진족 의형제도 있고 그런건 사실인데 어째서 요즘에는 이성계도 여진족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선대에 여진족 피가 섞였을지는 몰라도 세종은 1차 토벌 때와 달리 제2차 토벌은 전과도 크지 않았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전투의 목적이었던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놓치고 말았다. 누루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는데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보다는 상당히 늦었지만 그 여진족의 일부는 후금을 건국하여 명을 폐하고 청을 세운다. 같은 여진족이지만 여진족이 세운 조선과 후금과의 갈등도 많았다. 조선 또한 청을 내내 오랑캐라 멸시한다. 약 300년 간 중국을 지배하면서 여진족은 자연스럽게 중국인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생활화하게 되었다. 19세기 청이 멸망할 무렵에는 몇 가지 여진족의 문화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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