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서울 출생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랐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형인 이범태와 함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테러리스트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폭발물 마련 등 오랜 준비 끝에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우두머리)를 도살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했으며, 12월 17일 도쿄로 출발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그의 유해를 봉환하여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三義士墓)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서울 출생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랐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형인 이범태와 함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테러리스트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폭발물 마련 등 오랜 준비 끝에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傀首,우두머리)를 도살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을 했으며, 12월 17일 도쿄로 출발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만주국 황제 푸이와 함께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사쿠라다몬 폭탄투척 사건 참조).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미혼으로 처자식은 없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그의 유해를 봉환하여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三義士墓)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