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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의 선조(秦之先祖)는 전욱제(?頊帝)의 후예이다. 진의 시조 이름은 여수(女修)라고 하였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트리자, 여수가 이 알을 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少典)의 딸 여화(女華)를 아내로 맞았다. 여화는 대비(大費)를 낳았고, 대비는 우(禹)와 함께 물을 다스렸다. 치수(治水)에 성공하자 순(舜) 임금이 우에게 현규(玄圭)를 하사하니, 우는 받으면서 "저 혼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가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순임금은 "아! 비(費)야, 우를 도와서 공을 이루었으니 그대에게 조유(?游)를 내리노라. 장차 그대의 후손이 번창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요성(姚姓)의 미녀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대비는 조유를 공손히 받으며 순임금을 도와서 새와 짐승을 조련하니, 새와 짐승들은 그에 의해서 잘 길들여졌다. 이 사람이 바로 백예(柏?)인데, 순임금은 그에게 영씨(?氏) 성을 하사하였다. 대비는 아들 둘을 낳았다. 한 아들은 대렴(大廉)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으며, 다른 아들은 약목(若木)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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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진의 선조(秦之先祖)는 전욱제(?頊帝)의 후예이다. 진의 시조 이름은 여수(女修)라고 하였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트리자, 여수가 이 알을 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은 소전(少典)의 딸 여화(女華)를 아내로 맞았다. 여화는 대비(大費)를 낳았고, 대비는 우(禹)와 함께 물을 다스렸다. 치수(治水)에 성공하자 순(舜) 임금이 우에게 현규(玄圭)를 하사하니, 우는 받으면서 "저 혼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가 도와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순임금은 "아! 비(費)야, 우를 도와서 공을 이루었으니 그대에게 조유(?游)를 내리노라. 장차 그대의 후손이 번창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요성(姚姓)의 미녀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대비는 조유를 공손히 받으며 순임금을 도와서 새와 짐승을 조련하니, 새와 짐승들은 그에 의해서 잘 길들여졌다. 이 사람이 바로 백예(柏?)인데, 순임금은 그에게 영씨(?氏) 성을 하사하였다. 대비는 아들 둘을 낳았다. 한 아들은 대렴(大廉)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으며, 다른 아들은 약목(若木)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대렴의 현손은 맹희(孟?)와 중연(中衍)인데, 그들은 모습은 새를 닮았으나 사람의 말을 하였다. 태무(太戊)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 하려고 점을 쳐보니 점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아내를 얻어 주었다. 태무 이래로 중연의 후손들은 마침내 대대로 공을 세우고 은나라를 도왔으므로, 영씨는 대부분 현귀(顯貴)하게 되어 결국은 제후가 되었다. 중연의 현손은 중휼(中?)인데 서융(西戎) 지역에 살면서 서수(西垂)를 지켰다. 그는 비렴(蜚廉)을 낳았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세었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 두 사람은 자기들이 가진 재주와 힘으로 은(殷)의 주왕(紂王)을 섬겼다. 주 무왕(周武王)은 주왕을 정벌하면서 오래도 함께 죽였다. 이때 비렴은 주(紂)를 대신하여 북방으로 출사(出使)했는데, 돌아와보니 (주왕이 이미 죽어서) 보고할 곳이 없자, 곽태산(?太山)에 제단을 쌓아서 주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때 석관(石棺) 하나를 얻었는데, 그 석관에는 "천제께서는 비렴을 은나라의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렴에게 석관을 하사하여 씨족을 번창하게 하노라"라고 새겨져 있었다. 비렴이 죽자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오래혁(惡來革)은 비렴의 아들인데 요절하였다. 그에게는 여방(女防)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았고, 방고는 태궤(太?)를 낳았고, 태궤는 대락(大駱)을 낳았고, 대락은 비자(非子)를 낳았다. 이들은 모두 조보가 목왕의 총애를 받은 덕으로 조성에 거주하는 은혜를 입었으며 조씨의 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자는 견구(犬丘)에 살았는데, 말과 가축을 좋아했으며 또 사육과 번식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견구 사람들이 주 효왕(周孝王)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자, 효왕은 비자를 불러서 견수(?水)와 위수(渭水) 사이에서 말을 사육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말이 대량으로 번식되었다. 효왕은 비자를 대락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후(申侯)의 딸이 대락의 아내로서 아들 성(成)을 낳았으니 성이 후계자였다. 신후가 효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저의 선조가 여산(?山)에 거주할 적에 낳은 딸이 융족(戎族) 서헌(胥軒)의 아내가 되어 중휼(中?)을 낳으셨는데, 친척인 관계로 인해서 주(周)나라에 귀의하여 서수(西垂)를 지키니 서수가 태평해졌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주어 적자인 성(成)을 낳았습니다. 저와 대락이 다시 혼인을 맺어 서융족(西戎族)이 모두 귀순하였으니, 이것이 왕께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왕께선 그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자 효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백예가 순임금을 위해서 가축을 관리하였는데, 번식을 잘 시켜서 봉토를 하사받고 영씨 성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들도 나를 위해서 말을 많이 번식시켰기에, 나는 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부용국(附庸國)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는 진(秦)나라 땅을 비자에게 봉읍(封邑)으로 하사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 영씨의 제사를 잇게 하고서는 진영(秦?)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신후의 딸이 낳은 아들을 원래 그대로 대락의 적자로 삼음으로써, 서융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진영은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는 재위 10년 만에 죽었다. 진후는 공백(公伯)을 낳았고, 공백은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공백은 진중(秦仲)을 낳았다. 진중이 즉위한 지 3년, 주 여왕(周?王)이 무도(無道)하니, 제후들 중에서 배반하는 자가 있었으며 서융도 주 왕실에 반기를 들고 견구의 대락 일족을 주멸하였다.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하자 진중을 대부(大夫)로 삼아서 서융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진중은 재위 23년에 서융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장공(莊公)이라고 하였다. 주 선왕은 장공의 다섯 형제를 불러 7,000명의 병사를 주고 서융을 치게 하자, 그들은 서융을 물리쳤다. 이에 선왕은 진중의 후손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의 선조인 대락의 봉지인 견구까지 그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을 서수의 대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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