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산성은 봉화 청량산의 산성이다. 청량산의 산성은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 동문지가 있는 밀성대 아래에서 축융봉을 거쳐 구축된 일명 ‘공민왕산성(恭愍王山城)’과 다시 경일봉에서 선학봉을 지나 청량사가 있는 계곡 옆으로 포곡선을 그리며 형성된다. 축융봉엔 공민왕이 쌓았다는 산성이 있는데 '청량 산성' 혹은 '축융 산성' 또는 '공민왕산성'이라고 불린다. 축융봉 위에는 산성이 있는데 석축이 두루 에워싸고 있다. 그 넓이는 천 삼백 오십 척이다. 안에는 열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시내가 있어서 수천 명의 병마를 수용할 수 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축융봉으로 들어와 공민왕은 이곳에서 1년을 묵었다는 설이 있다. 산속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렀던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공민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공민왕 산성은 봉화 청량산의 산성이다. 청량산의 산성은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 동문지가 있는 밀성대 아래에서 축융봉을 거쳐 구축된 일명 ‘공민왕산성(恭愍王山城)’과 다시 경일봉에서 선학봉을 지나 청량사가 있는 계곡 옆으로 포곡선을 그리며 형성된다. 축융봉엔 공민왕이 쌓았다는 산성이 있는데 '청량 산성' 혹은 '축융 산성' 또는 '공민왕산성'이라고 불린다. 축융봉 위에는 산성이 있는데 석축이 두루 에워싸고 있다. 그 넓이는 천 삼백 오십 척이다. 안에는 열 개의 우물과 두 개의 시내가 있어서 수천 명의 병마를 수용할 수 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축융봉으로 들어와 공민왕은 이곳에서 1년을 묵었다는 설이 있다. 산속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렀던 공민왕이 축성했다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공민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청량 산성의 축성연대는 상고할 수 없으나 고려 제31대 공민왕 10년(1316)에 제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왕이 이곳에 와서 마지막 요새로서 이 산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 후 230년이 흘러간 뒤인 이조 제14대 선조28년(1595)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전 국토가 초토화 되었을 때 예찰사 이원익의 지시로 군수 이정회와 중 행청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였다. 산성의 규모는 석축의 둘레가 1만2천5백 척이며 말 5필이 동시에 횡대로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가 성을 따라 나 있으니 이를 오마도라고 한다. 산성 내부에는 4개의 문루외에도 연대사와 수많은 불교 유적사이에 고려시대의 도자기와 병기류가 출토되고 있다.